(3673)제79화 육사졸업생들(126) 38선 무력도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해방후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하여 38선 경비를 맡았을때는 쌍방간의 충돌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국군과 북괴군이 창설되고 전방경비를 이들이 분담하면서 긴장이 고조되더니 48년후반에 들어 미소양군이 철수, 남북의 군대가 38선 경비를 전담하게 되자 49년부터는 무력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49년5월초의 강태무·표무원의 부대 월북사건에 이어 북괴군의 백천·옹진침입, 태백산지구에 대한 남노당계 인민유격대의 남파등 남침사건이 잇달아 일어나기 시작했다.
10연대장 백남권중령이 포병중대장 노재현대위에게 명령하여 북괴의 기토문리기지에 포격을 가한 것이나 송요찬연대가 평양의 인민유격대 기지를 기습한것도 이때의 일이다.
기토문리사건 이후 미군이 한국군의 포 조준경을 회수하여 각 부대의 미군고문관이 보관하게되어 적절한 대응보복을 할수가 없게 됐다. 미군측은 그같은 포격사건이 반복되면 국제문제화하여 미소간에 전쟁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그후 잇단 북괴의 송악산·옹진·신남지구에 대한 월경공격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가 어렵게 됐다.
당시 미군측은 북괴군이 남침하면 격퇴하되 월경보복은 적이 10회정도 계속해 올 경우 한번정도의 비율로 하라는 방침이었던것 같다. 국군은 어디까지나 소극적·방어적인 선에만 머물러 있도록 한 조치였다.
이렇게 북괴의 남침은 가중되고 있는데 주포의 사용이 제한되어 작전상 중대한 곤란이 제기되자 육본은 38선 월경분쟁의 처리방침을 협의키 위해 49년6월하순 군원로회의를 소집했다.
초빙된 원로는 초대 육군참모총장으로 있다가 강태무·표무원의 월북사건으로 인책 사임한 후 다시 3사단장으로 나가게 된 이응준소장과 제1사단장 김석원대령, 제2사단장 유승렬대령등 일본군에서 대좌급으로 활약했던 고급 지휘관들이었다.
육군본부에서는 채병덕참모총장과 백선엽정보국장등이 임석했다. 회의는 채병덕소장 주재로 진행됐다.
장내의 의견은 「적극 반격론」과 「신중대응론」으로 양분됐다. 김석원장군이 적극 반격론의 선봉장이라면 백선엽대령은 신중대응론의 대변자였다. 그날의 회의는 이 두사람의 전략논쟁이었다한다.
수색에 본부를 두고 38선 방위책임을 맡고 있던 김석원장군은 『국가나 군은 모욕을 당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원칙을 고수하면서 북괴가 38선을 넘어 침범해오면 그것을 상회하는 무력과 빈도로 보복하여 다시는 넘보지 못하게 해야한다는 주장이었다.
그것은 일본군에서 오랜 야전경험을 쌓았고 얼마전 「육탄10용사」의 특공전술로 적의 남침을 분쇄하여 더욱 자부심을 갖게된 김장군의 평소의 소신이기도 했다.
그러나 후방에서 미군당국과 자주 접촉하며 국제정세와 남북한의 내부 사정까지 고려하면서 전반적인 전략문제를 다루고 있던 백선엽정보국장은 그간의 정보를 토대로 하여 반론에 나섰다. 당시로는 북괴가 우리보다 병력·장비·훈련에 있어서 월등하므로 확대보복은 적의 전면 남침을 유발할 위험이 있다면서 우리가 후방의 공비와 공산조직을 완전히 제거, 소탕하고 북괴를 능가할만큼의 힘을 기르기까지는 소극적인 방어태세로 임해야 한다는 것이 백대령의 주장이었다.
백대령은 만주의 장고봉과 노모항에서 일본이 『모욕당하지 않겠다』는 체면때문에 전략적으로 별로 가치가 없는 지점까지도 쟁탈을 감행하여 결국 일본의 허점이 탄로되고 그 때문에 러시아대군의 반격을 받아 고역을 치른 사례를 들어 김장군의 논리를 반박했다.
연령이나 군사경력면에서 백선엽대령을 어린애정도로 보고있던 김석원장군은 크게 분개하여 수염을 매만지고 지휘봉을 휘두르며 백대령을 향해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고 한다. 당시 김장군은 56세의 노장인 반면 백대령은 29세의 만주군 중위출신이었다.
그러나 백대령은 국가의 중대사임을 강조하면서 겸손하면서도 의연하게 조용한 어조로 그의 논리를 굽히지 않았다고 회의에 배석했던 이상국장군(2기·당시채병덕총장부관)은 전하고 있다.
그날엔 이렇다할 결론이 없었지만 그후 분쟁은 잦았어도 국군의 월경보복은 없었다. 미군의 지침과 백대령의 주장이 채택된것으로 보아야 할것이다.
49년 절정에 이르렀던 북괴군의 38선 무력도발과 남노당의 인민유격대 남침은 6·25라는 전면남침을 앞두고 북괴가 남쪽의 후방태세와 국군의 전력을 탐색하는 기간이었다고 할 것이다.
우리 국군도 그런 계기에 적의 장비와 그 성능, 북괴군의 전술·훈련도 등을 판단할 자료를 얻을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 태능의 육군사관학교에서는 8기가 교육을 마치고 축차적으로 임관해 나가면서 한편으로는 9기들이 차례차례 입교하고 있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