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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에너지 지원, 이 점을 짚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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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북핵 합의의 흥분이 채 가라앉기 전에 경수로 제공 여부와 이와 연관된 껄끄러운 '돈' 문제가 도마에 올랐다. 현실로 돌아오자마자 합의사항을 이행하는 재원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1994년 제네바 합의 때와는 달리 이번에 공세적인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상 '물주 역할'을 기꺼이 담당하겠다는 정부의 자청 때문이다. 정부의 '흑기사 역할론'은 국민 경제의 부담과 함께 국가적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정부는 에너지 지원 비용으로 평균 10년간 11조원선을 언급하고 있다. 중유.전기.경수로 제공에 따른 소요 비용 추정은 북한 현지 실태조사가 선행되지 않아 현재로선 매우 유동적이다. 북핵 합의의 이행 과정이 지연되고, 잠복해 있는 돌발변수가 튀어나올 경우 비용이 증가하면 증가했지 축소되지는 않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청와대가 언급한 대로 물류 운송 및 통신 인프라 등 북한 경제의 재건을 위한 사회기반시설을 구축하는 '포괄적 계획'까지 감안한다면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수 있다. 드디어 한반도 이북의 경제 재건이 한국 경제의 관할구역으로 부상하고 있다. 언젠가는 통일비용으로 부담해야 할 항목들이 북핵 합의로 조기에 구체화되고 있다.

동.서독 사례를 볼 때 남북한 경제.사회 통합에 지불해야 할 비용은 통일 이전 단계에서 여건 조성을 위해 지불해야 할 '통일 여건 조성 비용'과 경제 통합의 각 단계에서 양체제의 동질화를 위해 지불하는 '체제 조성 비용'으로 구분할 수 있다. '통일 여건 조성 비용'이 '체제 조성 비용'과 트레이드 오프(trade-off) 관계에 있다면 전자의 비용이 선(先) 집행되는 것은 후자의 비용이 줄어드는 것이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정부가 제시하고 있는 에너지 지원은 '통일 여건 조성 비용'에 해당된다.

대북 에너지 지원과 관련한 쟁점은 크게 세 가지다. 우선 에너지 지원이 집행될 수 있는 북핵 합의 사항의 적절한 이행과 남북 관계의 정상화가 관건이다. 모호성으로 가득한 합의사항 이행을 담보하기 위해선 에너지 지원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에너지 지원만 하고 핵 포기가 이뤄지지 않는 경우의 상상도 신포 경수로 전례로 보아 얼마든지 가능하다. 정부의 지원액이 북핵을 포기시키는 진정한 평화 비용으로 사용될 수만 있다면 정부안은 수용될 수 있다.

에너지 지원 시점도 예민한 사안이다. 북핵 포기가 가시화되는 시점에 맞추는 미래지향적 방안과 조기 지원으로 북핵 포기를 압박하는 당면 사업 방안 가운데 절충안을 고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원 시점이 너무 늦어도 곤란하지만 너무 이른 이행 방안도 시기상조론에 밀릴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국민의 동의와 지지다. 여야 합의 및 국민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추진한다는 원칙은 기본이다. 투명성을 바탕으로 철저하게 국민과 함께 가는 것이 역설적으로 국민의 지지를 받는 첩경이다. 특히 에너지 등 인프라 지원은 특정 정권의 전유물이 아니다. 여야의 정권 교체 여부에 상관없이 추진돼야 할 중장기 국책사업인 만큼 공론화가 불가피하다. 정부가 북핵 포기로 인한 '스폰서 역할'을 떠맡았지만 한국 경제는 소득 1만5000달러의 트랩에서 탈출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북핵 포기로 인한 혜택은 중장기적으로 부여되지만 직접비용 부담은 단기적인 사안으로 국민의 세금 부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 '예산 1% 대북 지원론'이 제기된 사례도 있는 만큼 타당한 지원 여건 조성과 함께 합리적인 방안을 도출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 번째는 국제사회의 공감대 형성과 지지 확보다. 정부가 대북 송전안으로 북핵 협의 과정에서 주도권을 확보했지만 한국의 단독 부담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적절하지 않다. 북핵 합의는 다자간 보장문서로서 북핵 포기에 대한 책임을 각국이 공유하고 분담하는 형식으로 추진돼야 북.미 관계 정상화 등 합의사항의 실효성을 담보할 수 있다. 정부의 독점보다는 각국의 참여를 유도하는 다양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남성욱 고려대 교수.북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