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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10번이나 두던 바둑광, 부친상 3년 동안엔 단 3번 … 아내 사망 땐 보름 만에 재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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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바둑 관련 내용으로 가득 찬 신석건 선생의 일기(위). 오른쪽 손가락이 가리키는 글자 圍碁(위기)는 바둑을 뜻한다. [프리랜서 공정식]

“1924년 8월 5일 일찍이 출발해 사천에서 종일 바둑을 두고 그곳에서 묵었다.”(早發歸沙川 終日 圍碁留宿)

 “1926년 5월 11일 독감으로 하루 종일 신음했다. 위원이 와서 바둑을 두었다.”

 일제 강점기의 한 선비가 남긴 일기의 한 부분이다. 붓으로 쓴 한문 일기다. 그는 바둑을 즐긴 사실을 일기 속에 꼬박꼬박 적었다. 원정 바둑에다 독감에 걸려서도 바둑을 둔 내용들이다.

 주인공은 경북 봉화군 물야면 수식리에 살았던 효산(曉山) 신석건(申錫建·1881∼1971). 그의 아버지는 안동 도산서원 원장을 지낸 유림 출신이다. 효산은 동생과 서당을 운영하며 소수서원을 출입하는 등 선비의 길을 걸었다.

 효산의 일기는 총 6권. 1924년 1월 1일 시작해 67년 10월 11일까지 43년간 이어졌다. 고서를 수집해온 경북 경산의 나라얼연구소가 소장 중이다. 조원경(58) 나라얼연구소 이사장은 “그동안 조상들이 남긴 일기 수백 종을 봤지만 바둑에 관한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이 일기에서 바둑 관련 기록은 1924년 1월 3일 “위원이 찾아와 임곡댁 사랑방에서 바둑을 두었다”로 시작해 66년 2월 4일 “아주 추운 날 용빈이 찾아와 바둑을 두면서 하루를 보냈다”로 끝이 난다. 5∼10일 간격으로 바둑이 등장한다. 바둑으로 밤을 새우거나 3일 연속 바둑을 둔 내용도 적혀 있다. 하루에 열 차례 바둑을 뒀다는 기록도 있다. 효산은 이처럼 바둑에 푹 빠져 식민지 시절을 신선처럼 지냈다. 그래서인지 일기에 남을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내용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주목할 만한 부분은 상주가 됐을 때의 취미 생활이다. 효산은 1944년 11월 부친상을 당했다. 22일 일기엔 “아버지가 오늘 오후 11시50분 별세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다”고 적었다. 이후 바둑 기록은 사라졌다. 1년이 지난 소상(小祥) 때는 “조문객이 끊이지 않는다. 묵고 가는 사람도 100명 남짓”이라고 썼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46년 9월 11일 바둑을 재개한 기록이 나온다. “양촌에 가서 원극과 바둑을 두었다”고 적혀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처음 두는 바둑이다. 이후 대상(大祥)까지 바둑 기록은 두 차례만 나온다. 아버지의 3년상을 치르는 동안 선비는 그 좋아하는 바둑을 단 세 차례 둔 것이다. 대단한 절제다.

 19년이 흘러 이번엔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1965년 1월 16일 일기엔 “오전 6시 노환으로 몇 달 동안 앓던 처가 죽었다. 향년 81세다. 처는 1903년 4월 21일 방년 열아홉살 내 나이 열여섯 살 때 시집 와서 63년간 해로하면서 사이 좋기가 한이 없었다”고 적었다. 7일장을 치렀고 조문객은 수백 명에 달했다. 바둑 매니어 효산은 부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보름 만에 바둑 돌을 다시 잡았다. 2월 1일 일기엔 “석남의 김용남 형이 찾아와 바둑을 두며 하루를 보냈다”고 적혀 있다. 부친상 때와는 절제 기간이 천지차이다. 일기에는 또 1940년 4월에 “25전으로 흑백 바둑알 100개를 구입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해 9월에는 “1엔10전으로 해저에서 바둑 두고 술대접을 했다”며 ‘내기 바둑’을 암시하는 대목도 등장한다.

 바둑 서지학자인 안영이(79)씨는 “일기 형식의 바둑 기록은 전례가 없다”며 “선비들의 여가 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말했다. 어렸을 때 같은 마을에 살았던 사람들은 효산의 유별난 바둑 취미를 잘 알고 있었다. 효산의 재종질인 신태관(72)씨는 “설날 세배를 가면 어른들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며 “세배를 마치고 나면 누가 둘 차례냐며 서로 다투던 기억이 난다”고 회고했다. 당시 효산이 쓰던 바둑판과 바둑 관련 책인 『위기초학전서(圍碁初學全書)』도 전해진다.

경산=송의호 기자 yee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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