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자유당과 내각(2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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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52년의 정·부통령선거는 최초의 직선제인데 비해 선거운동기간이 너무 짧았다. 대통령임기만료가 앞닿아 있어 불가피하기는 했지만…. 그러기에 행정조직의 힘은 거의 절대였다.
장택상총리는 이범석에게 쏠리고있던 대세를 뒤엎기위해 진두지휘에 나섰다.

<전용열차로 지원>
장총리는 전용열차를 내 전국순회에 나섰다. 그는 전용열차의 운행시간표를 윤우경치안국장에게 넘기면서 중요역 도착시간에 맞춰 인근지역 경찰간부들을 대기시키라고 지시했다. 장총리의 선거작전은 치밀했다. 당시 충남도청간부였던 S씨의 회고.
『장총리는 선두에 나서서 함태영 선거운동을 지휘했다. 당시 진헌직(충남) 신현돈(전북) 최헌길(강원)씨등 족청계 지사가 많았기 때문에 장총리는 묘기한 격파작전을 펼쳤다. 지사가 족청이면 도경국장을 통해, 도경국장마저 족청이면 사찰과장을 통해 선거운동을 밀고나갔다. 군단위에서도 군수·서장·사찰계장의 관계는 마찬가지였다. 때로는 직계인 부하경관도 이용했다.
장총리가 충남지역에 내려왔을 때의 일이다. 도경사찰과장은 장총리가 수도청장을 할 때 비서로 데리고있던 J모총경이었다. J사찰과장에게 충남을 맡긴 장총리는 족청세가 가장 강하다는 유성을 방문했다. 이곳 서장은 진헌식지사의 직계로 이범석의 부통령선거운동에 동분서주하고 있었는데 장총리는 연도경비가 시원치않다고 화를 내고 J과장에게만 지시를 내리고 떠나버렸다. 총리가 떠나자 J과장은 서장에게 함태영을 밀라는 총리지시를 전달했다.
서장은 진지사가 순시할 때마다 <잘되지>라는 질문을 받았고 그때마다 <잘되고있읍니다>라고 대답했다.
진지사는 이범석의 득표운동을 의미했고 의례 서장도 그런 뜻으로 들으려니했다. 그런데 투표당일 진지사가 유성에 독려차 나왔다가 <어때>라고 물었다. 그러자 서장은<이미 말씀드린대로 80%는 틀림없읍니다. 함태영부통령의 일은 잘되었읍니다>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진지사는 자기가 앉힌 서장이 난데없이「함후보 80%득표」를 보고하는 바람에 놀라서 상황을 따져 물어서야 내막을 알았다. 자기직계니까 이심전심으로 이범석을 밀거라고 믿은 것이 탈이었다. 장총리의 절묘한 테크닉에 걸려 족청의 아성이던 유성에서까지 이런 결과를 빚고말았다. 몇몇이 은밀히 추진한 일이기는 하지만 수많은 유권자를 상대로 하는 공작인데 이처럼 감쪽같이 일을 해냈다는 것은 경찰의 막강한 힘에만 돌리기보다는 족청자체에도 뭔가 문제점이 있었다고 봐야할것 같다.』
총리가 진두지휘에 나선 행정동원이었던만큼 경찰은 드러내 놓고 선거운동에 몰두했다. 전국곳곳에서 이범석의 선거벽보는 철거되었다. 밤사이 경찰이 이범석의 벽보를 떼어내고 그자리에 함태영후보의 벽보를 붙였다. 낮엔 족청계가 벽보를 붙이고 밤에는 경찰이 뜯어내는 사태가 도처에서 일어났다. 일부지역에서는 이범석 후보의 운동원이 경찰에 연행되어 온종일 역류당하기도했다.

<철기벽보 철거도>
관권의 선거개입에 대해 국회는 침묵했다. 족청계를 제외한 모든 정파가 이범석타도에 공동전선을 펴고있었다. 여당이면서 야당이 되어버린 자유당은 투표일직전 끝내 행정선거를 고발했다. 장택상총리 김태선내무 윤우경치안국장이 선거법및 공무원법을 위반했다는 사례들을 열거한 고발장이었다. 그러나 이 고발은 이범석후보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범석이 대통령의 눈밖에 났다는 소문을 확인해준 셈이 되었고 국회를 탄압했던 그가 곧바로 탄압을 받는 입장이 되었으니 마땅한 응보라는 비양거림도 있었다.
선거결과는 행정선거의 승리였다. 이 대통령은 차점자인 조봉암을 4백여만표차로 압승했고 부통령선거에서도 함태영후보는 차점인 이범석을 1백여만표차로 눌렀다. 부통령선거의 표차는 상식적인 예상과는 거리가 지나치게 벌어졌다. 이 때문에 선거과정은 그렇다치고 투개표가 공정해던지조차 의심스러웠다. 당시 선거법은 선거관리사무를 행정관리가 전담했기 때문이다.

<백만표 차로 눌러>
이런 선거과정과 결과는 정계의 바람을 예고했다. 족청중심의 자유당은「타도 장택상」을 공개적으로 성명했다.『선거의 공정성을 파괴한 반동세력을 가까운 장래에 타도 분쇄할 것임을 맹세한다』고 선언한 족청의 모사 양우정의 공개성명이었다. 이대통령은 내각에 족청계를 대거 기용했다. 장총리는 정부에서까지 족청계 각료에 포위되어있었다.
그리고 끝내 두달후인 그해 9월 고시진사건에 몰려 총리자리에서 밀려났다. 고시진이란 전경성부윤이던 일본인. 상선을 타고 부산에 입항한 고시진을 총리가 만난 것이 화근이었다. 족청은 총리가 일본의 밀정과 만났다고 몰아쳤고 철저한 배일정책을 밀고갔던 대통령은 장총리를 물러나게 한것이다.
국회도 변동을 겪었다. 정치파동에서 꺾이고 대통령직선제에서 무력했던 국회 각 정파는 대통령선거후 세력분포가 변동되었다.
야파인 원내자유당과 여당인 합동파와의 세력은 뒤바뀌어 합동파가 68석으로 불어난 반면 원내자유당은 합동파와 신라회로 이탈해간 의원이 늘어나 29석으로 줄어들었다.
개헌파동수습의 주역이던 21석의 신라회는 장택상의 국회복귀와 함께 교섭단체로 등록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국회는 야파가 과반수선을 확보하고 있었다. 야파의 국회지배가 무너진 것은 그로부터 6개월뒤인 53년5월이다. 이 기간 원내자유당의 이재학그룹10명, 신라회의 이종욱 서이환 4명, 그리고 무소속 구락부소속 의원등이 자유당에 흡수되어갔다.
의석 변동내용을 보면 자유당은 68석을 1백3석으로 늘렸다. 이 결과 21석이던 신라회, 20석이던 무소속구락부, 29석이던 원내자유당이 모두 교섭단체 등록에 필요한 20석선이 무너져 해체되었다. 국회는 자유당과 민국당의 두 교섭단체로 여·야의 구분이 명백해 졌으며 정부수립 5년만에 처음으로 이대통령은 원내 안정 세력을 확보했다. 의회가 정당정치의 길을 연 첫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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