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집 밖에선 저도 일등 요리사입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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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대학에 입학하며 등산 재미에 푹 빠진 한형석(31)씨. 동사무소 방위병으로 근무하면서도 퇴근을 북한산으로 할 정도였다. 산에서 밤을 지새고 출근하기를 밥 먹듯 했다. 복학 후엔 1년 동안 100회 이상 산에 올랐다.

1997년 한씨가 속한 석향산악회에서 알래스카 매킨리봉 원정 계획을 잡았다. 당당하게 원정대에 뽑힌 그가 맡은 임무는 식량 담당. 그동안 남이 해주는 음식을 먹기만 했던 한씨는 각종 자료를 모으고 선배 대원들에게 귀동냥하면서 만반의 준비를 했다. 한씨가 산에서 해먹는 요리, 이른바 '산요리'에 빠져든 계기였다.

"그런데 외환위기로 원정이 무산됐어요. 열심히 공부한 게 너무 아까워 산에 갈 때마다 다른 사람들에게 요리를 대접하기 시작했죠. 반응이 좋더라고요."

졸업 후 등산용품 수입업체에 취직한 한씨는 좀 더 욕심을 냈다. 한 월간지에 1회분 원고를 써들고 무작정 찾아가 "산.들.바다 등 야외에서 해먹을 수 있는 요리 칼럼을 쓰게 해달라"고 졸랐다. 이렇게 2002년 1월 시작된 그의 칼럼은 이번 달까지 빠짐없이 독자와 만나고 있다. 돼지목살찜.김치 떡만두국 등 그가 개발해 소개한 요리가 100가지에 육박한다.

"야외에서 해먹는 요리는 가정식과는 달라요. 조리법이 간편하면서 뒤처리가 용이해야죠."

그가 대표작으로 꼽는 '꼬꼬뱅'(프랑스식 닭요리)만 해도 정통 조리법과는 거리가 멀다. 올리브유로 닭을 볶다가 각종 야채를 썰어 넣고 와인.간장과 함께 졸이면 끝이다.

이 때문에 그는 요리강사 겸 푸드스타일리스트로 일하는 부인 진주(31)씨에게 핀잔을 자주 듣는다고 했다. "그건 마구잡이 닭졸임이지 꼬꼬뱅이 절대 아니다"라고. 아옹다옹 말다툼도 잦지만 그가 아이디어를 얻는 주요 원천은 바로 부인이다.

한씨는 "2년 전 결혼한 뒤부터 아내의 새 음식을 맛보는 '실험도구'로 살고 있다"며 "아내의 요리를 야외에선 어떻게 응용해 먹을 수 있을까를 항상 궁리한다"고 했다.

환경오염과 산불 예방을 위해 국내 유명 산의 경우 취사를 지정구역에서만 할 수 있도록 제한하고 있다.

"일본.미국 등 야외요리 문화가 발달된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음식을 해먹은 뒤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우리도 남는 재료가 없도록 계획을 잘 짜고, 조리 후 쓰레기를 깨끗이 수거하는 습관이 정착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스포츠용품 업체인 팀버랜드에서 일하는 한씨는 지난해 7월부터 1년여 동안 서울 청계산 인근 매장에서 산요리 시연회와 시식회를 열었다. 올해 안에 자신이 개발한 요리법을 책으로 엮어낼 계획도 있다.

"야외로 놀러 가면서 이런저런 신경쓰기 싫어 음식을 사먹겠다는 분들을 보면 안타까워요. 아이들은 물을 떠오고, 엄마는 쌀을 씻고, 아빠는 불을 지펴서 요리하는 체험을 한다면 재미가 배로 커지는데 말입니다."

신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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