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자유당과 내각(2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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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부산정치파동의 한복판에서 국회안 야파의 입장을 약화시킨 사건의 하나는 대통령저격 미수사건이다. 6월엔 29명의 의원이 구속되어 있었고 50명선의 의원들은 피신해 있었다. 이런 가운데 6·25동란 2주년을 맞이했다. 그날 이대통령은 부산에 있는 유엔군묘지만 참배하고 돌아갈 참이었는데 돌아오던 승용차 안에서 『내가 유엔일 보고 우리 국민들이 하는 일에 안 가서야되겠나』면서 차를 충무동광장으로 돌리도록 했다. 6·25 2주년 행사에 참석한 것이다.

<3m거리서 불발.>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대회장에 도착한 대통령이 단상에 올라가 훈화를 시작한 때였다. 귀빈석에 있던 유시태가 일어나 대통령의 뒤편 3m거리에 접근, 권총을 뽑아들고 저격했다. 찰칵하는 금속성이 났을 뿐 탄환은 불발탄이었다. 유시태는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며 그 배후인물로 안동출신의 김시현의원이 구속되었다.
얼마 후엔 민국당의 중진이던 서상일·백남훈 등도 구속되었다. 당국의 사건발표는 이랬다.
①김시현은 서상일로부터 2백만원을 원조받아 권총을 구입했다. 백남훈은 서상일이 김의원한테 돈을 주도록 주선했다 ②김의원은 권총 구입 후 동향인이자 의열단원으로 독립운동을 함께한 유시태를 하수인으로 포섭했다 ③김의원은 저격음모가 구체화되자 민국당을 탈당하고 신라회에 참가해 발췌개헌안을 찬성하고 야파의원 포섭활동을 벌이는 것처럼 위장했다 ④사건당일 유를 귀빈석에 안내했다는 내용이다.
민국당관련 혐의가 발표되자 민국당은 야당탄압을 위한 정치조작극이라고 주장했다. 4·19후에는 조작극이라는 쪽으로 얘기가 기울었다. 그렇지만 조작극이라고 단정할 자료는 없다. 민국당이 조작극이라고 내세운 근거는 세 가지다. ①서상일이 2백만원을 준 것은 내각제개헌 추진 자금으로 준 것이다 ②김의원은 신라회에 가담해 장택상 총리 및 총리측근인 오성환의원으로부터 많은 정치자금을 받았으면서도 서상일에게 돈을 청하고 그 돈으로 권총을 구입한 것은 김의원이 민국당을 함정에 몰아 넣을 의도였다고 보인다. ③치안국은 김의원의 대통령저격음모를 사전에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구속치 않고 불발탄을 교묘하게 건네주는 등 역이용했다. 그랬기 때문에 김의원에게 치안국의 지프까지 대여한 것이 아닌가라는 것.

<김시현의원 구속>
경찰에 사전정보가 있었고 지프를 빌려준 것 모두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조작극의 증거는 될 수 없다. 경찰의 사전정보란 역시 의열단원이었던 최양옥의 제보다. 최는 김의원이 맨 처음 하수인으로 지목했으나 독립운동을 하느라 젊은 시절을 보내고 그때 겨우 세살 짜리 아들 하나를 두고 있어, 찾아갔으나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랬기 때문에 최가 준 정보는 김의원을 경계하라는 정도였다. 치안국은 그후 김의원을 감시하다가 6월22일엔 일단 치안국으로 연행했었다. 이때 윤우경 치안국장이 김의원을 심문했는데 발췌개헌안 통과를 위해 의원포섭을 하고 있는 내게 대해 무슨 소리냐면서 도리어 치안국 승용차나 빌려주어야겠다고 시치미를 뗐다. 이 바람에 윤국장은 야파포섭을 활발히 하라면서 지프를 내주었다.
이 대목은 윤국장의 진술이나 김의원의 진술이 일치했다. 김시현의원은 항일테러단체인 의열단출신이어서 과격했고 그해 봄부터 은밀한 자리에선 이승만을 제거해야한다고 곧잘 말했었다. 재판에서도 그는 유죄로 인정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어쨌든 이 사건은 야파의 입장을 궁지로 몰아넣었으며 발췌개헌안 추진에 유리한 전기가 되었다. 6월말의 l주일사이 발췌개헌안 지지자는 1백명선에 이르러 7월2일부터 국회소집이 추진되었다.
피신해 있는 의원들의 소재수사를 펴 국회로 나오도록 하는 이른바 경찰의 국회의원 안내작전을 담당한 것이 대통령저격사건으로 교체되어온 박병배신임 경남경찰국장이다. 7월3일에는 구속되어 있던 의원들도 풀려나게 되어 재적 1백83명중 l백43명이 출석했다. 출석한 의원들 중 태도가 불확실한 의원은 국회에 연금 당했다.

<원외자유당 득세>
11월4일은 이른 아침부터 국회는 사람들로 붐볐다. 유엔한위관계자, 미·영 대사관원, 내외기자들이 국회로비를 메웠고 경찰 2개 중대가 국회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때까지 발췌개헌안에 서명한 의원은 1백10명으로 개헌선에는 13명이 미달돼 있었다. 국 회의장실에서는 각파 대표들이 발췌개헌안의 마지막 손질을 하고있었다. 김동성 부의장실에서는 내각제개헌파였던 65명의 의원이 따로 모여 격론을 벌이고 있었다.
하오6시30분 지루한 12시간의 격론이 끝이 났다.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켜 온 세계가 주시하는 한국의 정치위기를 일단 넘기자>는 결론이었다. 하오8시 발췌개헌안이 상정되었다. l, 2독회는 생략하고 마지막 3독회만으로 심의를 끝내고 하오9시35분 표결을 선포했다. 재적1백83, 재석 1백66·찬성 1백63·기권 3표. 이렇게 해서 40일에 걸친 정치파동은 국회의 굴복으로 결말이 났다.
대통령직선제 채택과 함께 국회의 야파는 산산조각이 났다. 제l당인 원내90석의 원내자유당은 정당으로서 기능을 유지할 엄두를 못 냈다. 원내자유당은 장면을 당수로 내정해둔 채 오위영·엄상섭 등이 이끌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장면과의 연락을 맡고 있던 선우종원비서실장이 정치파동의 와중에서 일본으로 밀항한 뒤 연락이 끊어졌다. 미군병원에 입원해있던 장면은 정치파동기간 정치의 표면에는 나서지 않았으며 선우비서가 무너지자 아무런 연락도 없이 정치에서 물러서고 말았기 때문이다.
유일한 야당이던 민국당도 허탈상태였다. 국회의 정파가운데선 이갑성이 중심이 된 자유당합동파와 장택상총리의 신라회만이 세력을 확장하는 재정비에 나서 있었다. 그러나 국회안 모든 정파들은 원외조직이 없었다. 그 때문에 대통령직선제에선 무력했다. 자연히 정치의 중심은 원외 자유당으로 옮아갔다. 직선제개헌의 주역이던 원외자유당은 이범석 내무장관의 족청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대통령직선제로 열릴 이승만시대 제2기는 이승만-이범석체제로 굳혀지리라는 것이 상식적인 예상이고 정치기류였다. 그러나 이 나라의 정치는 은밀한 곳에서 다시 정치의 방향이 선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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