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자회담 결렬 위기] 힐 "북, 협상을 전리품 뺏기로 여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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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측 6자회담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15일 오전 숙소인 중국대반점을 나서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베이징=연합뉴스]

2단계 4차 6자회담이 결렬 쪽으로 가파르게 치닫고 있다. 회담 관계자들은 15일 "다음 일정 잡는 일만 남았다"며 마무리 수순을 고민했다. 회담 재개 불과 사흘 만이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휴회 37일 만에 회담이 재개됐지만 북핵 문제는 결국 '휴회 당시 지점'(크리스토퍼 힐 미 수석대표)으로 정확하게 되돌아갔다.

회담 고위관계자에게 북핵 전망을 묻자 그는 물끄러미 창 밖을 가리켰다. 날씨마저 꾸물꾸물하던 베이징(北京)에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안개도 가득했다. 이 고위관계자는 "시계 제로"라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협상의 모멘텀(추동력)이 유지될까 걱정"이라고도 했다.

◆ 6자 회담 무용론 나오나=국제회의에서 '휴회'란 과중한 회의 일정으로 피곤해진 대표단이 일시 쉬는 뜻을 갖는다. 하지만 이것은 일반적 의미다. 북핵 문제는 이보다 방정식이 복잡하다.

우선 북한은 휴회 기간이 끝나도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협상장에 나타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4차 6자회담은 3차 6자회담이 끝난 뒤 13개월 만에야 열렸다. 또 회담에 나오더라도 현재의 입장을 되풀이 고집할 가능성이 크다. 북한은 7월 26일 4차 6자회담 1단계 회담이 시작된 이후 줄곧 신포 경수로 재개를 요구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북한이 경수로 건설 요구를 거두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핵 동결 대가로 경수로와 중유를 얻었던 1994년 제네바 합의에 비해 '남는 게 없는 장사'라고 북한이 생각할 수 있다는 뜻에서다. 그러나 "반드시 경수로를 가져야겠다"는 북한의 요구는 "경수로라면 말도 꺼내지 말라"는 미국 입장과 평행선을 달린다. 그런 만큼 워싱턴 반응도 관심사다. 대북 강경파인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이 "6자회담은 북한에 핵 활동 확대 기회만 준다"며 6자회담 무용론을 확산시킬 수 있다. 강경 여론이 힘을 받을 경우 북핵 상황은 급속하게 악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셈이다.

◆ "5차 6자회담은 생각 안해"=경수로 건설을 둘러싼 북.미 간 입장 차는 '북핵 폐기 대상'과도 맞물려 있다. 미국은 핵 폐기 범위가 확실해져야 융통성을 줄 수 있다는 것이지만 북한은 '경수로 요구'가 수용돼야 협상을 진행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이 말하는 핵 폐기 범위는 물론 모든 핵 시설이다. 이번 기회에 핵연료 농축→사용→재처리에 이르는 북한의 핵 주기를 끊어버리겠다는 것이고, 그러려면 핵물질 전용시설 외에도 핵연료봉 제조시설.동위원소연구소 같은 '평화적' 목적의 시설도 포함된다. 북한은 "현존하는 흑연감속로를 포기하는 대신 경수로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6자회담에서 북한이 당장 손에 쥐는 실질적 보상은 전력 제공(대북 중대 제안) 정도인 점을 고려하면 '약속은 많고, 실질은 적다'고 북한이 판단할 수도 있다. 김계관 북측 수석대표가 "(미국이) 정치적 의지와 함께 정책을 바꿀 의지도 있어야 한다"고 말한 것은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게 됐음을 의미한다.

정부 고위당국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6자회담의 틀이 깨지는 경우는 없고, 현실적으로 5차 6자회담도 생각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이제부턴 긴 호흡을 갖고 신중하게 가겠다"고도 했다. 좀 더 많은 것을 얻어내려는 북한 특유의 벼랑끝 전술이라고 아직은 판단하는 모습이다.

베이징=최상연 기자

"지금은 해돋이 전 암흑" 중국대표 회의 지속 요구
회담 사흘째 표정

15일 오후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의 6자회담 대표단 전체회의. 한국 대표단은 급박했다. 회의가 경색되며 논의가 '6자회담 중단'으로 흐르는 분위기였다. 한국 대표단이 나섰다. "희망은 있다"고 했다. 예상치 않게 러시아가 한국을 도왔다. "문안 타결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거들었다. 그러자 의장국인 중국 수석대표 우다웨이(武大偉) 외교부 부부장이 "지금은 해돋이 전의 암흑"이라며 회의를 계속하자고 나왔다. 회의는 일단 결렬을 피했다. 회의 직후 한국 측 관계자는 "전체회의에선 휴회의 '휴'자도 안 나왔다"고 했다.

하지만 이날의 전체 분위기는 비관적이었다. 미국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는 오전 숙소인 중국대반점을 나서면서 "지금까지 테이블에 없는 것(경수로)을 가지고 시간만 보냈다"고 북한을 비판했다. 비슷한 시간 한국 수석대표인 송민순 외교부 차관보도 굳은 표정으로 북경대반점 로비에서 말을 이어 갔다. "미국과 북한 모두 유연성을 보이지 않으면 회담은 타결에 이르기 어렵다." 3분 정도의 짧은 인터뷰였지만 북.미 간 극명한 이견 대립이 묻어났다.

이어진 북.미 2차 접촉은 1시간30여 분이나 진행됐다. 하지만 이견은 더 벌어졌다. 경수로를 둘러싼 북.미 간의 전선은 핵 폐기 대상 시설 문제로 확대돼 버렸다. 한 당국자는 "시계가 불투명해졌다"고 했다. 한국은 중국을 통해 북한 설득을 시도했다. '북한이 장래에 경수로를 가질 기회의 창을 열어 놓고 있다'는 논리로 양보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북.중 양자접촉에선 이런 얘기들이 오갔다. 그러나 성과는 없었다.

이날 마지막 일정이던 전체회의 직후 북한 대표단 현학봉 대변인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미국은 자기가 할 바를 하지 않고 우리보고 먼저 핵을 포기하라고 한다"고 으르렁거렸다. 남은 희망은 북.미 간 이견 조율이다. 그러나 미국의 입장은 분명하다.

힐 차관보는 이날 밤늦게 숙소로 돌아가며 "북한은 이번 협상을 전리품 뺏기(trophy project)로 여기는 것 같다"고 했다. 줄 생각은 않고, 뺏을 궁리만 한다는 비판이다. 그나마 일본을 경원시해 왔던 북한이 두 번째 북.일 접촉을 했던 게 이날의 긍정적인 소식이었다.

베이징=채병건 기자

미국의 다음 선택은
① 휴회 뒤 냉각기
② 본격 대북 압박

북핵 해결을 위한 베이징 4차 6자회담이 사실상 결렬 위기에 빠졌다. 북한이 '경수로 카드'를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미국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김계관 북한 수석대표는 14일 오후 북.미회담에서 미국 측에 "경수로 건설할 돈을 내놔라"고 요구했다. 금액으로는 20억~30억 달러(약 2조~3조원)에 이른다.

미국은 난감한 표정이다. 당초 복안은 이번 6자회담에서 북핵 해결을 위한 원칙적 합의를 도출한 뒤 실무 소위원회를 가동시켜 구체적 액션 플랜을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이 불쑥 경수로 카드를 내미는 통에 상황이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미국은 두 가지 선택을 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첫째, 6자회담을 일단 휴회하고 냉각기를 갖는 것이다.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북한의 경수로 카드는 '평화적 핵 이용 권리' 주장을 부각시키기 위한 측면이 다분하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일단 휴회한 다음 한.미 간 협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도 이를 바라고 있다. 6자회담의 한국 수석대표인 송민순 외교통상부 차관보는 15일 "우리는 북한이 장래에 경수로를 가질 기회의 창을 열어두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두 번째 선택은 대북 압박이다. 6자회담을 조용히 정리한 다음 대북 압박→유엔 안보리 회부 등으로 북한 옥죄기에 나서는 시나리오다. 안기부장 특보 출신인 이동복 명지대 교수는 "북한의 진정한 목표는 핵 보유국"이라며 "미국은 이제 6개월가량 시간을 벌면서 대북 압박을 준비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를 뒷받침하듯 미 국무부의 2인자인 로버트 졸릭 부장관은 8월 초 베이징에서 중국 측과 '북한의 장래'를 집중 논의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의 돈줄인 마약.위조지폐 불법 거래와 관련해 홍콩.마카오의 금융기관들을 강도높게 조사한 바 있다.

최원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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