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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의병장 석상용의 투쟁그린 기념비 지리산서 발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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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일제통치의 서술이 시퍼렇던 1921년, 당시 망국의 통분을 머금고 세상을 떠난 한의병장의 기념비가 지리산산중에 세워진 사실이 밝혀져 비상한 관심을 자아내고 있다.
비가 세워진 곳은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하늘이 아득히 열리고 사시사철 개곡의 물소리로 시끄러운 「지리산 첫동네」추성리에서 벽송사를 끼고 가파른 산길을 서너 시간쯤 오르다 보면 두루봉및 쑥밭재에 이른다. 바로 대원사로 가는 작 비는 쑥밭재 못미쳐 양지바른 길목에 세워져 있다. 고개를 들면 지리산 상상봉인 천왕봉(l,915m) 이 지호지간처림 가까와 보인다.
비의 앞면엔 「의병장 석상용지송공비」라 새겨져있다. 한말의 의병장 석상룡의 기념비-.
뒷면엔 5행 60자의 한자로 그의 생애를 기리고 있다. 「공의 자는 용아, 새칭 비호장군으로 용력이 절인하였다. 국가가 위급함을 보고 의롭게 나서 지리산중에서 많은 왜병을 무찌르다 일본헌병에 체포, 투옥되어 5년을 살았다. 돌아와서는 이로 인한 질통으로 수년을 고생하다가 경신(l920년)10월 분을 머금고 별세했다.』
(공자룡견 세칭비호장군용력절인 견국가위망 기의려우지리산중 참왜병심다 경피일보투옥경오년 방환인차질통수년신간 경신십월함분이 별세) 비문은 이어 l921년l월10일에 세웠다고 적고 있다 (신유정월초십일수).
크기는 높이 l백m10cm, 폭27cm, 두께 12cm 정도. 바로 옆에 산소도 함께 썼다.
그동안 자손들만이 외롭게 돌봤을 뿐 산중에 묻혀 있었던 것이다.
『조부님 산소까지 가려면 일곱 번이나 물을 건너야 돼요. 1년에 벌초할 때 한번 가기가 힘들 정도지요.』
그동안 이 비와 산소를 가꾸며 추성리에서 살아온 석덕완씨(47)의 얘기다. 그는 해주석씨의 14대손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의병장석상룡은 1907년 이 지역에서 동지 50여명을 규합, 의병대를 조직하여 함양 산청 남원 합천 일대에서 문태수 등의 부대와 합세, 「한일합방」때까지 의병활동을 펴다가 l912년 피검되여 진주형무소에서 5년간 징역형을 산 것으로 돼있다. 1917년 출옥했으나 고문과 장기형에서 온 고통으로 신음하다 20년10월26일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6·25를 거치면서 진주형무소를 비롯한 관계관공서의 서류가 모두 불타고 집마저 공비들의 습격으로 세 차례나 불타고 나니 남은 서류나 유물은 찾을 수 없고 다만 비만이 그가 남긴 유업을 알려주고 있다며 후손들은 안타까와하고 있다.
비는 이듬해 1월 의병장의 셋째 아우인 채룡씨(작고)등 몇몇 동네사람들이 극비리에 추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지역을 답사한 조동목교수(국민대·한국사)는 처음엔 당시의 일제탄압 속에서 과연 의병장 비를 세울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이 앞섰으나 막상 돌아보니 험준한 산세로 보아 가능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한편 석씨 일문이 이런 산중에 숨어살게 된데는 연유가 있다.
이들은 바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원병을 강력히 주장하여 실현시킨 명의 병부상서 석성 (l538∼1599년)의 후예들이다.
『서애집』에 따르면 당시 유성룡은 명조정의 움직임이 ▲압록강만 지키며 사태를 더 살펴보자는 관망론 ▲이적끼리 싸우는데 끼어들지 말자는 불참전론이 우세했다고 지적하고, 이때 명과 조선의 관개가 입술과 이빨(둔치)사이의 관계라며 조선이 침략당하면 명도 온전치 못할 것이라고 주장, 조선원병을 관찰시킨 것은 석성의 공로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는 정유재난이 발발하자 이에 문책 받아 투옥된다. 옥사하기 전 석성은 순과 행, 두 아들에게 조선으로 가서 후대를 잇기를 유언했는데 둘째아들 치은 먼저 나와 경상도 성주지방에 정착했으며 맏아들 박은 부친의 옥사와 함께 귀양갔다가 희종때 방면되어 황해도 해주지방으로 피신했다. 평양에 무열사를 지어 석성을 추모하던 조선에선 바로 이들을 후희 대접, 수양산 밑에 전답을 내리고 담을 수양군에 봉했다.
이렇게 시작된 해주석씨가 해주땅을 떠난 것은 명이 맘하고 청이 들어설 무렵. 청조정이 조선에 있는 명의 유민들을 송환하라고 요구하자 조정에선 은밀하게 사람을 보내 피신을 권했으며, 그후 그들이 찾아간 땅이 산음, 즉 지금의 경남 산청지방이다. 영조당시 그들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찾는 것도 화를 입는 것으로 알고 더욱 깊이 숨어든 곳이 바로 지금의 함양 지리산 골짜기다.
이들이 성주지방의 혈족과소식이 통하게 된것은 바로 10여년전의 일이라고.
이러한 사연을 확인한 조동목교수는 석성에서 석상용(12대손)으로 이어지는 이들 가문이「항일」과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는 점에 관심을 보였다. 한편 이현종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은 『의병비가 3·1운동 직후의 위험상태에서 세워진데 큰 의의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같은 정신이 있었기에 일제침략 하에서도 광복될 때까지 국내항쟁이 가능했다고 말하고, 이러한 비가 세워진 우리 민족의 정신사를 재구현하는 한편, 이같은 비가 또 있는지 전국적인 조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이근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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