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자유당과 내각(13)「방위군부정」·「거창사건」잇달아 터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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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개헌을 추진하던 두 갈래의 정치구상에는 나름대로 명분이 있고 이유가 있었다. 내각책임제를 내세운 국회내 정파들의 개헌명분은 이대통령의 행정독단을 막기 위해서라고했다. 당시 이대통령이 전시행정을 총괄하고 있었고 국회의 행정간섭을 철저하게 묵살한 것은 사실이다.

<실정의 표본으로>
그러나 그것은 설득력있는 명분이 될 수는 없었다. 개헌공작은 추진과정에서 명분을 찾았다. 수 많은 장정을 희생시킨 국민방위군사건 과 거창사건은 이승만을 권력의 자리에서 밀어내야한다는 명분이 된 것이다. 이 두개의 사건은 정부에 치명적인 실정의 표본이었다. 특히거창사건을 은폐하려고 한 대통령의 사건처리방식은 이유가 있기는 했지만 중대한 과오였다. 거창사건에서 대통령은 편견을 갖고 있었다. 거창사건이 알려지기 시작했을 때 장면총리와 조병옥내무장관이 사건의 중대성을 보고하고 조속히 진상을 조사해 관련자를 처벌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때 대통령은 내각에 협조해 사건을 신속히 그러나 소리없이 국비로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그때는 중공군이 개입해 전세가 불리하던 때여서 외국의 한국에 대한 인식이 중요했다. 대통령은 그런 형편을 더욱 중요시했다. 그런데 신성모국방장관의 일처리가 사실의 은폐가돼 문제를 확대했다. 신국방은 대한부인회회장 김철안, 여군부장 김현숙을 대동하고 거창현지를 다녀왔다.
그러곤 이들 두 사람을 데리고 대통령에게 가서 국방부의 조사와 세사람의 현지답사 결과 양민학살이란 사실무근이며 양민이 아닌 공비토벌을 한것이라고 보고했다. 이 때문에 그 얼마 뒤 장면총리와 조내무가 두번째로 들어가 경찰보고를 토대로 사건내용을 설명하려하자 대통령은 말을 가로막아 버렸다. 왜 내각이 협력해서 일을 하지 않고 서로 헐뜯느냐는 얘기였다.
그당시 내각에서 신국방이 고립되어 있었고 대통령도 그런 사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내무의 다른 얘기는 신성모국방에 대한 모함인 것으로 본듯하다. 대령이 사건의 진상을 하게 된 것은 외지보도에서다. 52년 4월 24일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은<거창사건을 내각에서 잘처리한다고 했는데 잘 되어가고있나>라고 물었다.
갑작스런 질문이어서 신국방이 엉겁결에<네,잘 처리되었읍니다>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대통령은<이 신문을 봐>라면서 워싱턴포스트지를 내던지듯 국무위원석으로 건네주었다.

<이 보라구, 치마폭 부끄러운 곳은 외국에 내보이지 말라고 했잖아>이렇게 화를 터뜨렸다.
대통령은<정부의 장관들은 서로 협력해서 일을 해야 잘 되는 법이오. 거창사건으로 인해 내무·국방·법무 3부장관들이 협력하지 않은 까닭에 대한민국의 체면이 국제적으로 손상되었소.그러므로 오늘부터 국방과 내무장관은 즉시 사임하시오>라고 했다.
이 때 김준연법무장관이<거창사건의 책임을 지고 저도 그만 두겠읍니다>라고 하자 <그렇게해>라고 했다.

<신국방 거짓 보고>
이렇게 해서 3부장관이 물러났다. 당시 경무대 비서였던 황규면씨는 대통령이 그때 3부장관 경질을 결심한 것같지는 않았다고 했다.
대통령은 몹시 분주했고 그 때문에 거창사건은 장면총리에게 지시를 했으니 총리가 3부장관을 조정해 처리가 잘 될 줄 믿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외지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내각이 다툼만 하고 있었고 그런 결과가 오도록 손도 쓰지 못한 총리의 무능을 답답해 했다. 그래서 국무회의에서 화를 냈고 그 결과가 그대로 3부장관 해임으로 결말나게 됐다는 것이다.
국민방위군사건은 참담하고 중대한 실정이고 신성모국방의 무능과 무정견이 너무도 처참하게 드러난 사건이다. 국민방위군사령관 김윤근준장은 신국방의 직계이자 이대통령의 신임도 두터웠다. 신국방은 김윤근의 부친과 각별한 친분이 있었다.
이 연고로 신성모는귀국직후 대한청년단 단장을 맡게되자 청년단의 운영실권을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김윤근에게 맡겼다. 국민방위군을 편성할 때 김윤근은 대한청년단 단장을 맡고 있었다. 청년단을 이박사의 충성스런 조직으로 이끌고 있던 김윤근에 대한 대통령의 신임도 확고했다.

<3부장관 물러나>
국민방위군은 1·4후퇴 때 정규군에 임대하기엔 연령이 높은 장정들을 전력화하고 또 후송하는 수단으로서 편성했다. 밀리고 있는 전선에서 현역을 이일에 동원하는 대신 대통령은 이 과업을 대한청년단에 맡겼다. 국민방위군 설치법은 국회에서 통과돼 법적인 뒷받침은 이루어 졌으나 예산이 따르지 못했다.
당시 군의 예산이란 미국의 원조에 의존했는데 정규군에 대한 지원은 있었지만 정부가 갑작스레 구상해서 조직한 국민방위군에 대한 예산지원이 곧장 주어질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공명심만 가득할 뿐 무모한 청년단은 장정들을 마구잡이로 끌어넣었다. 예산이라고는 보잘 것 없는 국민방위군의 후송작전이었고 그 겨울의 추위와 굶주림속에서 동원된 장정이 쓰러져갔다. 국민방위군에 그런대로 예산이 배정된것은 51년 봄부터다.
그는 방위군의 숫자가 크게 줄어있었으나 실제의 숫자보다 훨씬 많은 병력으로 책정된 예산으로, 전시하의 그 어려웠던 시점에서 보면 풍족한 예산이었다. 이 예산을 방위군 간부진이 마구 뿌렸다.그때쯤 방위군은 굶주림에 익숙해 있다고 본 것일까. 이미 방위군 안에는굶주림으로 쓰러진 희생자가 많아 간부진은 책임을 져야 할 사태에 이르러 있었다.
그런 사태의 수습책으로서 책임자들은 국회와 감독기관에 돈을 마구 뿌렸다. 방위군의 참상은 국회·국방부·육군본부·합동헌병대등 관계요로에 진정서가 계속 날아들었다. 헌병사령부에선 조사에 착수하고 있었고 2윌엔 엄청난 부정의 한가닥을 포착했다.
즉시 신국방에게 사건개요가 보고됐다.그때 신국방은 <백만대군을 무장시키려고 교육을 하고 있는데 쌀을 팔아 먹다니…>라는 말로 수사를 하라고 했지만 곧바로 태도가 돌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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