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높아진 소비자 의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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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물건값을 내리고 불친절을 시정하라-.』 지난해 6월부터 5개월간 서울 압구정 H아파트 주민들이 아파트 단지 상인들과 맞서며 내건 구호였다.
서울의 부촌으로 불리는 H아파트 입주자들은 단지 내 S상가와 K슈퍼마키트의 횡포를 성토하고 부녀회 (회장 임춘자·46)와 반상회를 열어 행동으로 맞섰다.
『여건이 개선되지 않으면 발길을 끊겠다』는 최후 통첩을 보낸 후 용산 청과 시장과 노량진 수산 시장의 직판 상인을 불러들여 임시 매장을 벌였다.
1주일에 2차례, 화요일과 금요일 상오 8시30분부터 3시간 동안 아파트 공터에서 열리는 장터는 호황을 이뤘다. 물건이 신선하고 값도 시장보다 20%정도 쌌다.
처음엔 끄떡도 않던 상가 측은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소비자는 왕이다」라는 말은 경제 서적에서나 볼 수 있는 허구일 뿐 소비자들은 매일처럼 쏟아지는 상품과 광고의 홍수 속에서 「값에 속고 질에 우는」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했던 것이 현실.

<왕은 못될지언정…>
소비자가 왕의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할지언정 「제몫」이라도 찾자는 것이 소비자 캠페인이 싹튼 계기가 되었고 이제는 이곳저곳에서 목소리가 한층 드세 지고 있다.
이 같은 운동은 소비자들의 단합된 힘이 첫째 무기. 서울 도곡동 G아파트 입주자들은 회사측이 하자 보수 요구를 묵살하자 회사가 직영하는 슈퍼마키트에 대항, 불매 운동을 벌여 무릎을 꿇었고 반포동 H아파트는 어린이들의 정서를 해치는 부근 상가의 전자오락실을 철거시키기 위해 상가 배척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최근엔 서울 시내의 동과 지방의군이 자매 결연을 하고 산지의 농산물을 직거래해 상인들의 중간 마진을 흡수하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불매나 배척 운동을 통한 소비자의 단합은 극단적인 경우이고 최근엔 소비자의 의식 향상에 따라 조그만 불이익도 고발을 통해 해결한다.
김숙희씨 (50·여·서울 남가좌동)는 D고속회사가 거스름돈 6원을 주지 않았다고 YWCA소비자 고발 센터에 신고했다.
지난해 10월29일 D고속에서 강릉행 좌석표를 구입했던 김씨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차표를 물렸으나 규정대로 10%를 공제한 2천9백16원을 반환 받지 못하고 2천9백16원만 받았다는 것이 신고 내용.
YWCA측은 D고속에 이 같은 고발 사실을 통보하고 시정을 요구, 김씨에게 6원을 환불받도록 했다.
소비자들의 불만을 대변하고 그들의 결집된 힘을 발휘하는 것이 60년대 말부터 싹을 내린 각종 소비자 보호 단체.
이들 단체를 통한 불량 상품 고발은 이제 보편화됐고 최근엔 서비스나 보험·계약 등 다양한 영역으로까지 파고 들고 있다.

<약속 불이행 고발>
지난해 1년 동안 소비자 연맹·주부 클럽 등 소비자 보호 단체 협의회 산하 5개 단체에 접수된 고발은 모두 2만1천여건.
고발 내용은 가전제품·문구·식품·의류 등 상품의 결함이 대부분이었지만 공공 서비스나 보험·금융 등에 대한 불만도 1천4백여건에 이르렀다. 소비자 파워의 향상과 함께 지난해 처음 도입된 「공개 회수 제도」는 소비자 운동의 신기원.
이 제도는 상품의 구조적인 결함이 발견 됐을 때 기업 측이 이를 인정하고 공개 회수→보상하는 것으로 S석유 레인지·STV보안기·K코트 등이 이 같은 시도로 소비자의 환영을 받았다.
과대 광고로 인한 약속 불이행도 소비자들은 용서하지 않는다.
지난해 10월 맥심 코피 사은품으로 코피 잔과 티스푼을 내걸었던 D식품 측은 약속을 지키지 못해 무더기 고발을 받았다. 회사측은 신문을 통해 공개 사과를 내고 사은품을 나눠주었다.
소비자들은 상거래의 현장으로 뛰어들어 부조리와 불만을 찾아낸다.
한국 소비자 연맹 (회장 정광모)은 지난해 11월 한달 동안 서울 경동 시장을 뒤져 분량을 속이는 됫박 3백여개와 저울 30여개를 찾아내 수리하고 상인들에게 계몽 활동을 폈다.
국민학교를 찾아가 꼬마들로부터 불량 학용품을 고발 받기도 하고 맹아·농아원을 찾아 이동 고발도 받는 등 여성 모니터들의 활약은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과학적인 소비자 운동을 위해 자체 실험실을 갖추는 것도 최근의 추세.
소비자 단체 협의회와 소비자 연맹 등은 지난해 말부터 대규모 실험실을 가동, 식품과 공해관계 물질 등을 즉석에서 성분 측정을 하고 있다.
3년간 국내 시판을 기도했던 초음파 미안기는 소비자 단체가 비교 실험 끝에 『과학적인 근거도 없고 효과도 의심된다』고 판정해 끝내 시판이 중단되기도 했었다.
정부도 이에 발맞춰 지난해 9월 소비자 보호법 시행령을 공포, 제조업·도소매업·가스업 등 1백15개 업체가 스스로 소비자 전담 기구를 두어 불만과 고발을 받고 피해를 보상토록 하고 있다.

<상품 실험실 갖춰>
소비자 단체들도 12월3일을 「소비자의 날」로 지정하고 「행동하는 소비자」란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현장 교육과 즉석 고발을 받는 등 큰 환영을 받고 있다.
생산자도 판매자도 넓게는 하나의 소비자일수밖에 없다. 이 같은 당연한 논리가 무시되고 「소비자가 종」으로 전락하면 생산·판매자도 결국엔 추악해지게 마련이다.
『우물에 침을 뱉는 자는 언젠가 그 우물물을 마시게 된다』는 옛말이 진가를 찾을 날도 멀지 않았다. <한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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