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즐겨읽기] '바람의 딸' 지구의 상처를 쓰다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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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 서부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의 난민촌에서 현지 어린이들과 승리의 V자를 들어보이는 한비야씨. 그는 지난 5년간 왕복 74회, 그것도 비행시간 열다섯 시간이 넘는 아프리카와 중동을 집중적으로 다니며 사랑의 봉사를 펼쳤다.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한비야 지음, 푸른숲, 308쪽, 9800원

2002년 겨울이었다. 당시 오지여행 전문가에서 긴급구호 활동가로 변신한 '바람의 딸' 한비야씨가 영화 '칸다하르' 시사회장에서 한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미사일.총알로 했던 아프가니스탄의 전쟁은 끝났다. 앞으론 사랑.약품.식량의 전쟁을 해야 한다." 이란 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칸다하르'는 탈레반 정권 밑에서 신음했던 아프간의 고단한 현실을 시적 영상에 담았었다.

이후 한씨는 아프가니스탄 헤라트로 날아갔다. 그해 3월 중순부터 6주간 가뭄과 기아의 땅 아프간에서 사랑을 펼치고 돌아온 그는 "펄펄 날리는 아프간의 흙먼지가 밀가루였으면 하고 소망했다"고 말했었다.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세계 최대 기독교 민간단체(NGO)인 월드비전에서 지난 5년간 긴급구호팀장으로 일해온 한씨의 지구촌 현장 보고서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시작해 아프리카 말라위.잠비아.시에라이온.라이베리아, 그리고 이라크.네팔.팔레스타인.이스라엘을 거쳐 올 여름 북한까지 가난.질병.재해.전쟁 등에 할퀴고 상처 난 사람들을 껴안고 보듬었다.

한씨를 만난 사람들은 그의 '유쾌 바이러스'에 감염되곤 한다. 세상의 시름을 환한 얼굴로 지우는 그의 '매력'에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신간은 그를 똑 닮았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폭력을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돌리는 단순하고도 솔직한, 그러면서도 항상 유머를 잃지 않는 '인간 한비야'가 튀어나온다.

예컨대 그는 자신의 객관적 외모를 'B+'로 평가한다. 집에 거울이 있으니 본인 스스로 잘 알고 있다는 건. 그러나 최고의 얼굴로 살고 싶다고 말한다. 이목구비 예쁜 얼굴이 아니라 밝고 환해서, 그래서 당당한,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사랑스런 얼굴로 살겠다고 다짐한다.

책에는 남에 대한 월등의식이 아니라 '나와 너는 다르지 않다'는 진실을 믿고, 또 그런 세상을 향해 힘들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걸음을 내딛는 '사랑의 전사'가 선명하게 그려진다.

제목의 지도는 구분.차이를 뜻한다. 경계선이 분명한 지도에서 뛰쳐나와 하나 된 세상에 뛰어들겠다는 뜻이다.

실제로 저자는 민족.인종.빈부.남녀.국가의 경계를 허물고 사람 속으로 몰입한다. 아프가니스탄의 고도(古都) 헤라트에선 배고픔에 죽어가는 아이들에게 영양죽을 먹이고, 남부 아프리카 말라위에선 가난.무지가 초래한 에이즈의 비극을 아파하고, 올 여름 북한의 개마고원 씨감자 사업장에선 지평선 가득히 만발한 하얀 감자꽃에 감탄하고 등등.

한국을 베이스 캠프 삼아 모두의 형제자매가 되겠다는 '세상의 딸'의 동작 하나, 말 한마디에 기쁨과 슬픔이 교차한다. 세상 험한 물정을 익히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착한 신념'을 옹고집처럼 밀고 나가는 그의 열정에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다. 사심 없는 한 여인의 힘이 이렇게 클 줄이야. 역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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