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8)4기생 출신 장성-제79화 육사졸업생들(7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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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4기생중 유일한 중장인 이병형장군 (57·함남 북청) 은 언행은 차분하지만 어디에서나 돋보이는 군인이었다. 그의 깊은 지식과 인격·두뇌, 그리고 군인으로서의 자세와 능력때문일 것이다.
이장군은 작전과 전략면에서 당당한 일가를 이루고 있었다고 본다.
그의 경력이 말해주듯 대대장·연대장을 거쳐 1사단장·5군단장·2군사령관등 지휘관과 사단·군단·육본의 작전참모, 합참본부장 등 작전장교의 주요 보직을 모조리 거친 정통파 작전통이다. 나와는 6·25때 육본 작전교육국에서 같이 일했다.
이장군이 합참본부장으로 있던 73년 8월 북괴는 연평도등 우리 서해5도에 대한 침공을 계속했다. 그때 이에 대한 대응책을 둘러싸고 한미간에 미묘한 상황이 되어 있었다. 이장군은 처음부터 「절대고수」의 강경론을 굽히지 않아 결국 미국측이 손을 들고 우리 방침대로 따라주었다.
그가 합참에 있는 동안(72∼74년) 북괴의 위협이 계속되는데도 미국은 닉슨 독트린에 따라 군사원조를 줄이고 아시아에서의 군사개입과 공약을 축소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성능좋은 무기가 필요했는데 미국은 낡은 재래식 무기만 주려고 했다.
이때 이장군은 미국이 우리 공군에 새로 관계한 팬텀기에 달려 있는 벌컨포를 보고 이것을 우리 기술진에 주어 국산화하자는 착상을 내놓았다.
8개월간 비밀리에 연구하여 그와 똑같은 성능의 벌컨포를 생산해 내는데 성공하여 오늘의 우리 국군의 주요무기가 된 것이다.
후에 8군부사령관「프레내건」중장이 이 고성능 최신식 국산무기를 보고 혀를 내둘렀지만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다.
해·공군의 전술에까지 통달하여 합동작전 능력을 갖추게 된 작전통이 아니면 생각해 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후배나 동료 장교들에게 늘『프러페셔널(직업적)한 군인이 되라』 『한반도는 4강의 이익과 전략이 교차되는 다이어먼드같은 지역이니만큼 스위스나 스웨덴같은 「국방국가」로 다져 놓아야 한다』 『전술에서 이기고 전략에 저는 일이 없도록 고급 지휘관은 전략능력을 갖추고 있어야한다』고 늘 말해 왔다.
합참에 있으면서는 해군이나 공군에서 파견나온 장교들을 각별히 보살펴 타군 장교들 사이에서도 존경받는 육군장성이었다.
이장군은 76년에 퇴역하여 농기계 제작회사인 대동공업 회장으로 있다가 10·26후 퇴직하여 『대대장』이라는 책을 써냈다. 그가 30여년간의 군대생활을 릉해 얻은 지식과 경험을 정리한 전술서적으로 지금 육군의 중요한 교본으로 사용되고 있다.
요즘도 그는 전쟁사·전략론등 군사서적을 탐독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있다.
4기생 출신 소장은 5명이고 준장은 9명이다.
소장 출신으로는 지금 국회 교체위원장을 하고 있는 황인성 (57·전북 무주), 농림장관을 거쳐 지금 농장을 경영하고 있는 조시형(56·충북 옥천), 공사 출신의 윤승국 (57·평북 강계), 주월 맹호부대 사단장을 지낸 정순민(57·경남 함양), 현대자동차 고문으로 있는 이병엽 (56·강원 고성) 장군 등이 있다.
정순민장군은 주월 맹호부대 사단장으로 월맹·베트콩의 테트공세(68년1월) 를 잘 막아내 지역안의 우리 피해는 전혀 없었다. 그후 국방부 병무국장·2군부사령관·5관구사령관을 거쳐 예편했다.
내성적이어서 말이 적은 편이고 월남에서 맨손으로 돌아왔다고 소문날 경도로 청렴·결백한 분이다.
예편 후는 전혀 생소한 언론분야에 종사, 74년부터 언론 통·폐합때까지 8년간 부산MBCTV사장과 국제신문부사장을 지냈다.
조시형장군은 울주에서 성장하고 부산을 지역구로 하여 정계에 진출했기 때문에 보통 경남 출신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충북 옥천 사람이다.
그의 군사경력은 화려하지 못하나 5·16때 4기대표로 혁명위원회 구성에 참여. 최고회의 내무위원장을 맡았고 민정이양때 옷을 벗고 정치에 참여, 무임소장관·6대국회의원·청와대정무수석비서관·농림장관 (69∼70년)을 지냈다. 그후 정계를 떠나 지금은 울주에서 삼남목장을 경영하고 있다.
윤승국장군은 본래 포병출신인데 5·16이 나던 해인 61년 국방대학원을 졸업한후 주미 수석무관으로 발탁됐다. 그는 5·16후 첫 주미무관인뎨, 당시 군원의 필요때문에 군수통인 그가 뽑힌 것으로 보인다. 그후 현역으로 주불 공사를 지냈고 예편후엔 주미 공사를 지냈다.
그는 6·25가 날때 일본주둔 미24사단 공병대에서 포병훈련을 받고있다가 전쟁이 터지자 곧 귀국, 미24사단에서 차출돼온 첫 미군 참전부대인 스미드부대의 연락장교로 참전했다. 지금은 구두 제작회사 엘칸토의 고문을 맡고 있다.
춘천사범학교를 나와 교편을 잡고 있다가 육사에 들어간 이병엽장군은 28사단장·국방부병무국장·전투교육기지사령부 부사령관·2군 부사령관을 지냈다. 얼굴에 웃음이 그칠줄 모르는 선량한 인품에 군인티가 안나는 장군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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