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길육십년<4>고아원 송죽원원장 이신덕 여사 (72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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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오 주여 나로 하여금 당신의 도구로 삼으소서 미움이 있는곳에 사랑을 범죄가 있는곳에 용서를 분쟁이 있는곳에 화해를-. 고아원 송죽원의 이신덕원장(72·서울서대문구홍제동356) 방에는 성「프란시스」의 기도문이 걸려있다. 일생을 하루도 빠지지않고 이 기도문을 외어왔다고 한다.
지난 1978년까지 23년간의 숭의여고교장으로 더 잘 알려진 이원장의 70년간 생활은 바로 이기도문과 걸맞는다.
70인생의 결산으로 볼 수 있는 지금 이원장의 생활은 고아원안의 3평도 안되는 사무실겸 거처방에서 고아 2명과 함께 기거하고 있다.
『돈이 남아야 집을 짓지. 빚얻어서 내집 짓나-.』
개인을 위해 재산을 모으지 않았던 그는 교장시절에는 전셋집에 살았는데 주위에서 집마련을 권할때마다 이같은 답변을 했다고 한다.
『평양 숭의학원에 들어가면서부터 단체생활이라는 것이 몸에배고 말았지.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일생은 그때 이미 정해진거라는 생각이 드는군.』
이원장의 고향은 평북 위원군위원면성내동. 시골에서는 비교적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평양에 나와 숭의여자중학교와 숭의보육전문대학을 나올수 있었다. 그러나 학교에 다니면서 자수를해 학비를 벌었다고 한다.
보육대학을 마친후 원산에서 유치원원장을 하다가 1938년 세브란스의대 기숙사사감으로 왔다.
해방이되자 숭의학원 선배였던 박현숙씨 (작고·전국회의원)와 함께 고학생기숙사 송죽원을 열었다.
이북에서 단신 월남한 어린학생들의 숙식문제를 해결해 주자는 의도였다.
『남산에 있는 옛KBS자리였는데 학생들을 모아보니 70여명이나 되더군. 딱한 사정들이 많아 세브란스를 그만두고 송죽원총무를 맡았지.』
각 기관이나 회사에 호소문을 보내고 직접 찾아다니며 성금을 모았다. 해가 바뀌면서 기숙사에는 남쪽에서 상경한 학생들도 많아졌다.이원장은 기숙사의 면학분위기를 위해 자신도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여 젊은학생들과 함께 공부했다.
그가 서울대를 졸업한 50년, 6·25가 터지고 만다.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마지막 남은 사람이 나를 합해 7명이더군. 부산으로 내려가 세브란스시절의 제자에게 해변통 방2개를 빌어 기거하게 되었지. 그곳에서 또 사람이 늘어나 모두 12명을 이끌고 재주도로 떠나게 되었어.』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재주의 성산포에 내리고 보니 정말 막막하기만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늘 도와주신다는것이 계원장의 신념. 아니나 다를까 원산시절의 재자가 군복을 입고 그의 앞에 나타나 그를 북제주읍까지 데려다 주었다.
중학상급반과 대학 재학중이었던 송죽원 식구들과 함께 이곳에서 송죽공민학교를 열었다. 23명의 학생에서 차츰 l천명의 규모로까지 확대되었다.
송죽원식구들에게는 주식배급이 있었으나 부식을 해결할 길이 없어 그는 제주의 미군부대와 교섭, 그들의 빨래와 바느질을 해주어 부식비를 벌기도 했다.
제주에서의 4년. 학교를 세우려고 당시 정부가 있던 부산으로 와 그때 무임소장관이었던 박현숙씨를 만났다.
『제주에서 학교를 세우는 것도 좋지만 모교인 숭의학원을 재건하는것이 더 급하니 교장을 맡아달라』는 것이 박장관의 말.
이에 동의한 그는 제주에서 모은 50여명의 고아와 함께 54년 상경하여 숭의여자중·고등학교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송죽원도 현재의 위치인 홍제동에 새로 지어 이사했다.
『그때는 제일 크고 깨끗한 고아원이었는데 지금은 시설이 낡아 불편하기 짝이 없다』고 그는 안타까와 한다.
『나는 무엇이든 제일이라는것을 좋아하지. 숭의에 있을때도 합창·농구 배구등 나가면 1등을 해왔어. 우리나라를 1등 나라가 되도록 해야 하는데 그 1등 나라를 만들려면 1등 인간을 많이 길러야 했다는것이 내생각이었고 1등인간이란 바로 인간다운 인간이어서 내교육이념은 바로 「인간다운 1등일꾼」이었다구.』
쉴사이 없이 그에게 지워졌던 일 때문에 결혼은 생각도 못해보았다.
만약 결혼을 했더라면 학교나 송죽원에 바쳤던 정열이 그만큼 줄어들지 않았겠느냐고 반문한다.
지금도 은근히 화가 나는것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고적하거나 의롭다고 보는것이다.
『나는 내 생활에 만족하고 늘기뻐하고 있어. 일생동안「적막해서 어떡하나」라는 생각은 해볼틈도 없었지.』
숭의의 제자들이나 송죽원출신들이 편지를 보낼때면 꼭 「어머니」나 「엄마」라는 호칭을 쓴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이 어머니같은 교장선생님, 어머니 같은 원장선생님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리광섞인 편지내용, 눈물어린 호소, 하루에도 몇통씩 오는 제자들의 편지가 바로 그의 보람이기도 하다.
『어제는 박현숙씨와 나의 고모가 꿈에 나타났어. 이젠 나도 하느님곁에 갈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더군. 건강이 더이상 나빠지기 전에 하느님이 불러주셨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아직 고아원 시설을 좀더 편리하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생각때문에-.』
신여성이란 시대적인 위치때문에 그에게 끝없이 지워진 짐을 성실히 지고 일생을 살아온 그는 몸이 불편한 지금도 살뜰히 돌보아주는 사람없이 고아원걱정만 태산같다. <김징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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