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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뉴올리언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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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역사적인 중대 고비마다 미국의 운명을 결정한 도시가 뉴올리언스다. 독립전쟁은 1815년 뉴올리언스 전투에서 결판났다. 총알을 총구에 넣어 쏘는 신형 머스킷 총으로 무장한 영국군은 오합지졸인 앤드루 잭슨(나중에 미 제7대 대통령)의 민병대를 깔보았다. 그러나 잭슨 민병대는 "승리 아니면 죽음(Victory or Death)"을 외치며 죽기로 덤볐다. 사거리는 짧지만 한꺼번에 수십 개의 납탄이 발사되는 잭슨 민병대의 사냥용 엽총에 영국군은 벌집이 됐다.

지루한 공방전이 이어지던 남북전쟁 역시 뉴올리언스에서 운명이 갈렸다. 1864년 뉴올리언스 앞바다에 북군의 군함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해상 봉쇄가 시작된 것이다. 유럽행 목화 수출이 중단되고, 그 돈으로 수입해야 할 총기.탄약류 반입이 끊기면서 전쟁의 판세는 북군 쪽으로 기울었다. 2년간 승승장구하던 남군의 리 장군은 도리 없이 뉴올리언스 봉쇄 1년 만에 항복했다.

뉴올리언스는 원래 노예 무역의 창구였다. 흑인들의 슬픈 선율은 재즈를 낳았다. 재즈의 발상지 '뉴올리언스 재즈'는 악보가 없는 게 특징이다. 즉흥 연주가 다반사였고 순전히 귀로 음악을 전수받았다. 흑인들이 악보를 볼 줄 몰랐기 때문이다. 재즈가 제대로 꽃을 피운 것은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으로 뉴올리언스가 군사 항구로 지정된 이후다. 뉴올리언스 유흥가가 된서리를 맞자 흑인 연주자들은 일자리를 찾아 미시시피강을 거슬러 시카고와 뉴욕으로 흩어졌다. 그곳에서 백인들의 귀를 사로잡으며 '시카고 재즈' '스윙 재즈' 등 재즈 전성시대가 열린 것이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물에 잠긴 뉴올리언스가 다시 미국 사회의 전면에 등장했다. 약탈.성폭행.굶주림이 할퀴고 가면서 흑백 인종갈등과 빈부격차 등 미국의 수치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굳이 뉴올리언스를 재건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이야기도 나온다.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여주인공 비비언 리가 방황하던 아름다운 도시, 뉴올리언스. 오늘따라 루이 암스트롱의 '뉴올리언스를 그리워하는 내 마음을 아시나요(Do You Know What It Means to Miss New Orleans)'의 선율이 한층 애처롭다. 그 도시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