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장창국 3기생 좌익세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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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3기생은 육사문을 나선지 1년 남짓 사이에 한 내무반에서 생활을 같이해온 동기생끼리 적과 우군으로 나뉘어 유혈을 벌여야 했다.
1948년 여순반란사건의 주모자인 김지회·홍순석 두중위가 3기생이었고 이들의 반란부대를 토벌·진압한 일선 중대장 대부분이 또한 3기생들이었던 것이다.
당시 중대장으로 잘 싸웠다고 알려진 인물은 12연대 3대대 9중대장을 하던 송호림중위와 3연대의 양찬우중위, 이미 작고한 황명중위(대령예편)등이 꼽혔다.
반면 진압군으로 내려갔던 12연대2대대5중대장인 3기생 김응록중위는 반난군 편에 동조, 토벌에 소극적일뿐 아니라 대대장에게 기관총을 쏘는 등의 행위가 드러나 동기생인 김창룡의 숙군때 총살당했다.
당시 토벌군의 선봉으로 순천시에 들어갔던 송호림중위는 반군 l백87명의 투항을 받아내기도 했다.
중장으로 예편한 송중위는 착실한 카롤릭신자로서 지금도 서울 압구정동 성당의 사목회장을 맡아 열심히 교회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는 당시 자기가 시가전에서 죽지않고 반란 진압에 기여할수 있었던 것은 신의 가호가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신심은 유명하다. 그래서 원래 그의 이름도 하느님 한분만 믿는다 하여 중령때까지 송일신이라 했다가 호부대인 l연대에 연대장으로 나가면서 송호림으로 바꿨다고 한다.
3기생중 박시창장군은 56년 내가 1군단장할때 부군단장으로 있었다. 광복군 계열중 중국군에 있던 분들이 많은데 그중에서 중국군의 최고 엘리트코스라고 할만한 육군대학을 나온분은 김홍일·최용덕장군과 박시창장군 뿐이었다.
황포군관학교 5기생인 그는 내가 백인엽장군 후임으로 l군단에 갔을때는 군단장실에서 멀리 떨어진 코너에 방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참모가 일일이 부군단장의 결재까지 받을 수는 없으니 내가 결재하는것을 옆에서 보면서 내용을 알아두어야 유사시 군단을 지휘할 수 있을것』이라면서 같은 방을 쓰자고 했더니 그때부터 크게 기뻐하면서 매사에 적극성을 보였다.
그는 그날 그날의 상황을 일기식으로 깨알같은 중국어로 노트하고 있었다. 아주 꼼꼼하고 건실한 분이었다. 함남 영흥태생인 그는 올해 80세로 시흥에 살고 있다. 1군단때 내가 소장으로 32세일때 박장군은 준장으로 53세였다. 그래서 나는 그분을 어른 모시듯 해야 했다.
나는 초대 현충사 소장을 지낸 최영성장군과도 같이 일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지금도 선배나 동료의 길·흉사에는 발벗고 나서서 궂은 일, 좋은 일을 마다않고 해주고 있다. 전우들사이에선 천당자리 맡아 놓은 사람이라고 통한다.
그밖에도 동양워너 고문으로 있는 김우형소장, 한국특수철강 고문 김성준장, 군병참계통의 경험을 살려 사업에 성공한 대덕공업회장 김일기준장, 해태제과 고문 김영하준장, 중국군출신인 대한중석 고문 박기성준장, 금성정밀 고문 박우경준장, 백선엽장군의 총애를 받았고 머리가 우수했던 박진석준장(미국이민), 명성컨트리클럽사장 박창록준장, 대한방직협회 고문 손창규준장, 원호처장을 지낸 부일 물산사장 윤영모준장, 한국타이어 고문 정린택준장(전중앙고속사장), 정일권장군의 전속부관이었고 지금은 공항실업사장으로 김포공항에서 식당을경영하고 있는 이극성준장, 삼환기업고문 조혁환준장, 원풍산업사장 조흥만준장, 대한알미늄 고문 진용곤준장, 체신차관을 지냈고 대한해상화재보험상임고문인 최병권준장,그리고 윤탁중소장과 김계형 문정식 서정학 안광영 이규문 이규광 이준성 이중한 정영홍 허준준장 등이 3기생에서 별을 따낸 분들이다.
3기생 장군중 김용순 박승규 이원희 박응규 차문호 최석용씨 등은 이미 작고했다.
뭐니뭐니해도 3기생중에선 김창룡장군이 가장 일찌기 이름을 날렸고 또 많은 얘기를 뿌리고 갔다고 하겠다.
46년 여름 어느 일요일 내가 육사부교장으로 있을 때 당시 1연대에 있던 최경녹과 한강에 보트를 타러 지프로 달리고 있는데 성남극장 앞에 이르니 군중이 모여 있어 길이 막혔다.
차를 내려 걸어가 보았더니 김창룡이 공산주의자와 격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차를 주어 연행케하고 우리는 걸어서 한강까지 갔다.
김창룡은 우리 군에 누도 많이 끼쳤지만 공산세력을 제거키 위해 휴일도 아랑곳 없이 열심히 일했던 것만은 부인 할수 없다. 그에 관한 얘기는 너무나 많기 때문에 앞으로 기회있을때 마다 풀어나가기로 하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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