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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 연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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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먼 곳에 있지 않아요. 당신 곁에 가까이 있어요~." 1985년 한 가요제에서 선보인 '그대 먼 곳에'라는 노래 가사의 도입부다. 20년 만에 이 노래가 다시 부활하고 있다. 사내 커플들이 그만큼 많아진 것이다.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나 인터넷 채팅방, 결혼 중개업체 등 젊은 남녀가 만날 수 있는 채널은 다양해졌다. 하지만 상대방을 고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역시 곁에서 지켜보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사내 연애는 단연 최고다. 그러나 단점도 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사랑 고백이 쉽지 않고 동료들의 눈도 피해야 한다. 들통나거나 깨지면 곤란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사내 연애에 성공한 커플들의 이야기를 모아본다.

◆ "들통난 사랑, 오히려 공개하니 마음 편해" -패밀리레스토랑 아웃백스테이크하우스 문정국(29)

우리 커플이 처음 본 것은 2003년 여름이었다. 아웃백 부천 상동점에 파견 나와 각각 주방 담당 트레이너와 홀 서빙 담당 트레이너로 근무할 때였다. 하루 몇백 명의 손님을 치르고 신입 직원 교육까지 맡아 서로 얼굴을 맞댈 기회는 거의 없었다. 둘 다 호감이 있었지만 표현하지 못한 채 2주 후 각자의 매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다 우연히 본사에서 다시 그녀와 마주쳤다. 너무 반가워 휴대전화 번호를 주고받았고, 남자친구.여자친구 사이로 발전했다. 처음엔 이 사실을 공개할 수 없었다. 사내 연애를 삐딱하게 보는 시선에 신경이 쓰였고, 만약 사귀다 헤어지면 누군가는 일을 그만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이 터지고 말았다. 동료 여직원이 느닷없이 나에게 호감을 표시해 온 것이다. "여자친구가 있다"고 했는데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그녀에게 결국 사내 연애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 소식은 놀랍도록 빠르게 퍼졌다.

처음엔 상의 없이 공개했다고 여자친구가 서운해 했다. "소중한 우리 사랑을 지켜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며 애교를 부리고서야 풀어졌다. 나중에는 바람피울 기회를 걷어찬 나를 대견하다며 칭찬까지 했다.

사내 연애를 굳이 숨기기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세상에 비밀은 없다. 시작도 하기 전에 헤어질 것부터 염려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사내 시선을 의식해 주눅 들지 말아야 한다. 이제는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우리 사랑을 지켜보며 든든한 울타리 역할을 해 준다는 느낌이 든다.

◆ '은밀한 스릴러는 사랑을 배가시킨다'-회사원 A씨(30)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둔 동료지만 함부로 감정을 고백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우리 회사는 좀 보수적인 분위기다. 사내 커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결혼하면 부서를 바꾼다. 서로 쉽게 마주치지 않도록 적어도 두서너 층 이상은 차이가 나도록 한다.

지난해 말 지방에서 부친상을 당한 회사 동료를 위해 함께 문상을 간 여덟 시간이 찬스였다. 그날따라 그렇게 심했던 교통체증에 감사할 뿐이다. 조용한 차 안에서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다가 "오래전부터 유심히 지켜봐 왔다"고 넌지시 고백을 했다. "머리가 띵하다"며 난감한 표정을 짓던 그녀는 결국 '비밀 엄수'를 조건으로 일요일 데이트에 응했다.

9개월간 우리는 몰래 데이트를 해왔다. 데이트 원칙은 세 가지였다. 되도록 회사로부터 먼 곳에서, 데이트 약속은 사내 전화 대신 반드시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만, 그리고 낮에는 반드시 선글라스를 끼고 만났다. 그래도 두 번의 위기가 있었다. 한번은 영화를 보고 나오다 회사 동료에게 들켰다. 옆에 있던 여자친구를 툭 치며 큰 소리로 "어, ○○씨도 이 영화 봤어◆ "라고 묻고는 시치미를 뚝 뗐다. 신촌의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다 회사 선배에게 들통난 적도 있다. 코가 비뚤어질 때까지 술을 마시고, 술값까지 내가 계산하며 "제발 살려달라. 절대 소문내지 말아달라"고 읍소한 끝에야 선배의 입을 막을 수 있었다.

은밀한 데이트는 '비밀을 공유한다'는 공감대 때문인지 사랑의 강도를 한껏 높여준다. 그 덕분에 우리는 목표를 앞당겨 11월에 결혼할 계획이다. 결혼 사실은 사보를 통해 당당히 공개할 작정이다. 요즘에는 행복한 고민이 있다. 결혼식 때 양쪽의 축의금이 너무 차이 나면 괜히 부부싸움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데이트를 즐기면서 동료들의 축의금을 어떻게 공평하게 받을 수 있을지 함께 궁리하는 게 재미있다.

◆ '우연을 가장한 작업, 끈기로 맺은 사랑'-마이크로소프트 고경신(34.여)

남편은 원래 다른 협력업체에서 일하다 내 곁으로 옮겨왔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어느 세미나에서 내가 신상품 프레젠테이션하는 모습을 보고 호감을 가졌다고 한다. 당시 거래처이던 우리 회사 임원에게 입사 추천을 해달라고 몇 날 며칠을 빌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 온다. 지난해 5월 결혼한 우리 커플은 한국마이크로소프트에서 각각 마케팅과 세일즈 업무를 맡고 있다.

그이가 입사 직후부터 본색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당시 나는 잘나가는 규수였다. 선을 보거나 소개팅을 한 것만 해도 80번은 넘을 것이다. 노처녀의 높은 콧대가 꺾일 때까지 남편은 2년을 잠자코 기다려야 했다.

그러다가 사내 스키동호회에서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됐다. 어느 토요일 새벽, "잠이 와서 스키장에 못 가겠다"고 했더니 집 앞까지 차를 몰고 왔다. 단둘이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배경으로 깔린 바그너의 잔잔한 선율들도 깔끔했다. 오페라.클래식에 조예가 깊은 그가 괜찮게 보이기 시작했다. 연주회 표가 있는데 함께 가자는 유혹에 넘어가 결국 매주 공연을 보러 다니는 사이로 발전했다.

1년간 사내 연애를 했는데 결혼식을 3주 앞두고 청첩장을 돌리기 전까지 우리 회사에서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농담하지 마라""지독한 것들" 등 다양한 반응이 쏟아졌다. 이후 우리 커플의 공식 명칭은 '호박씨'로 굳어졌다.

신혼 초에는 공과 사를 구분하자며 집에서 회사 이야기를 먼저 꺼낸 사람이 1만원의 벌금을 내기로 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공통 관심사는 회사일이었다. 영업을 하는 남편은 고객사로 바로 출근하는 일이 많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아침에 함께 출근한다. 차 안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하루 일과를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이 순간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남들은 느끼지 못할 나만의 행복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