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2030 일터에서

분·초를 나눠 뛰는 PR우먼 "공부를 이렇게 했더라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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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대학 때 그렇게 열심히 했으면 고시라도 서너 개는 너끈히 붙었을 텐데…." 늦은 밤 퇴근하는 딸에게 문을 열어주는 어머니의 말씀에는 안쓰러움과 빈정거림이 뒤섞여 있다. 방문을 닫고 침대에 누워도 머리만 지끈거릴 뿐, 잠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거실에서 어머니의 넋두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온다. "제 머리도 못 깎는 주제에, 남 홍보한다고 저렇게 설치다니…쯧쯧."

먼저 2005년 7월 13일 내 수첩에 적힌 나의 하루를 소개한다.

오전 7시부터 50분간 수영을 한 뒤 출근하면 8시30분부터 온통 회사 일이다. 고객 회사들과 미팅, 파트너 회사와 인터뷰, 사내 주간회의, 신문기사 모니터링, 담당기자와 면담 등 30분~1시간 단위로 9건의 업무를 소화했다. 모처럼 동료와 저녁식사를 한 뒤 오후 7시 다시 사무실로 올라간다.

고객 회사용 컨설팅 보고서를 작성하다 보니 퇴근시간은 밤 12시15분. 다시 잠시 몸을 누이러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그날도 아마 어머니의 잔소리는 빠지지 않았을 것이고, 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을 것이다. PR 전문회사인 인컴브로더에서 근무한 지 5년. 나는 마치 인기 연예인이라도 되는 양 분초를 쪼개가며 살아간다. 제멋에 살지 않으면 못할 일이다.

처음 만난 분에게 'PR 회사에 다니는데요'라고 대답하면 다음 질문은 대개 이렇다. "그럼 어떤 광고 만드세요?" 가끔 측은한 표정을 지으며 위로해 주시는 분들도 적지 않다. "땡볕에 고생이 많으시겠네요." 아마 이벤트 도우미와 헷갈리신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서 아직도 PR은 낯선 직업 중 하나다.

인컴브로더는 내 첫 직장이다. 흔히 '홍보(弘報)'라고 하는 PR은 좋지 않은 이미지로 찍혀 있다. 뭔가 나쁜 것은 적당히 포장해 없는 것처럼 시치미를 딱 잡아떼거나, 잘난 것은 아무리 사소해도 동네방네 소문내는 점잖지 못한 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없어서는 안 될 것이 PR이다. 수많은 불특정 고객을 대상으로 회사와 상품을 효과적으로 소개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내가 맡고 있는 일은 언론을 대상으로 한 PR이다.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배포하거나 CEO 인터뷰를 진행하고 기자회견을 연다. 하지만 이는 PR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내가 일한 지난 5년간 PR 산업은 빠른 변화를 겪었다.

요즘에는 리서치 연구소.컨설팅 회사.광고 대행사.이벤트 회사 등과 많은 부분에서 점점 겹쳐지고 있다. 경쟁이 심해지면 몸과 마음이 바쁠 수밖에 없다.

PR 업계에서 "저 친구 한 PR 한다"는 칭찬을 들으려면 뭘 좀 알아야 한다. 컴퓨터.네트워크 장비에서부터 패스트푸드.의료.정부 정책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방면에서 뛰어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일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분야마다 전문가들이 많아 대충 아는 척했다간 본전도 못 건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TV나 신문도 우리에겐 여가 수단이 아니다. 한 번도 맘 편히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탐구의 대상이다.

지난해에는 안식월을 받아 유럽.캐나다.미국 등지를 배낭을 메고 돌아다녔다. 3년 이상 근무한 직원에게 한 달간 유급휴가를 주는 우리 회사의 독특한 복지 제도다. 이때 연봉의 10% 이내에서 교통비를 지원해 주는데, 가능한 한 멀리 가서 많이 돌아다니라는 것이다.

모처럼 휴가인데도 직업병이 도졌나 보다. 체코에서 혹시 고객회사에서 연락이 없었는지 e-메일을 체크하다가 회사 상사에게 야단을 맞았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배우고 오라는데 왜 쓸데없이 회사일에 신경을 쓰느냐"며 내 통신망을 아예 차단시켜버렸다.

우리 회사에는 30세를 넘긴 노처녀들이 적지 않다. 남을 홍보하는 데는 '선수'지만 자기를 PR하는 데는 '젬병'인 경우가 많다. 일이 바빠 남자 친구를 사귀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힘들고 어려운 만큼 보람도 크다. 청각장애 아동을 위한 사회 공헌 프로그램이나 유아 보육의 공공성 확대 프로젝트를 맡아 많은 사람에게 관심을 불러일으켰을 때가 그중 하나다. 지난 7월에는 회사 직원들이 함께 '리서치가 있는 맛있는 PR'이란 책을 펴내기도 했다. 요즘 나는 건축 분야의 홍보 컨설팅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가끔 충북 이원아트빌리지나 파주 헤이리 문화예술단지 등을 방문해 건축 전문가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낀다. 때로는 그 어렵다는 루이스칸의 책을 뒤적이며 건축의 예술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지나온 5년보다 앞으로 걸어나갈 '홍보쟁이'의 길이 더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PR 전문가는 2005년 3월 포춘지가 선정한 향후 10년간 인기를 끌 유망 직업 중 하나가 아닌가.

최윤정 (31.인컴브로더 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