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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뱅, 전통과 현대의 하모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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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벨기에에 있는 작은 도시 루뱅은 1425년 루뱅대학의 설립과 함께 중세도시가 대학도시로 활기를 되찾았다. 다른 전통적인 도시들처럼 루뱅도 오랜 벗과 만나는 듯한 편안함을 안겨주는 묘한 매력이 있는 곳이다. 오랜 세월 사람들의 손결이 스쳐 지나간 부드러움이 스며 있기 때문일까. 나폴레옹이 통째로 옮겨가고 싶어 할 만큼 탐내었다는 거대한 시청 건물과 맞은편에 위치한 대성당이 위압감보다 친근감을 준다.

루뱅의 아름다움은 전통과 현대의 하모니에 있다. 색 바래고 마모되어 어느 한곳 온전한 형태를 가지지 못한 벽돌 건물들을 이곳 사람들은 자랑스럽게 사용한다. 옛 성당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 속에서 젊은이들이 현대학문을 탁마하고 있어 이곳이 처음부터 학문이라는 매개를 통해 전통과 현대를 만나게 하는 장소였다는 사실을 잘 말해준다. 굳이 캠퍼스 건물이 아니라 해도 옛 건물을 그대로 방치해 두는 법이 없이 알뜰히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루뱅의 거리를 걷다 보면 일본의 전통도시 교토(京都)와 대조적인 감을 가지게 한다. 전통과 현대가 나란히 평행선을 유지하고 있는 교토에서는 전통적인 것들, 특히 보물일수록 현대인들과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그것들은 불행히도 보호라는 명목 아래 사람들의 접근이 금지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은 바라보면서 감탄만 해야 하는 대상으로 전락해 버렸다. 교토에 있는 금각사를 상상해 보라. 호수 위에 세워진 금각사는 마치 생동감을 잃어버린 박제된 동물처럼 인간의 숨결과 고동을 느낄 수 없다. 이는 전통이라는 과거 시간에 영원히 묶여 있을 뿐이다.

루뱅의 보물들에는 접근금지 표시가 없고 도리어 시청.성당.학교.은행.박물관 등 공공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이들 중 베겐호프는 유네스코에 등록된 건물들이다. 12세기께부터 다일강변에 유럽 여성 신자들이 모여 수도하던 곳이란다. 이곳에서 수행하던 여성들은 로마교황청이 인정한 수도자도 세속적인 가정을 꾸민 사람들도 아니었다. 이들은 교단과 사회가 여성에게 부여한 불합리한 제약을 뛰어넘어 자유로운 삶과 영성생활을 영위하고자 수행공동체를 만들었다고 한다. 각자 작은 집을 짓고 살면서 노동과 수행을 겸한 이들의 공동체 생활은 대략 17세기까지 계속되며, 이들이 남긴 약 200개의 작은 집을 베겐호프라고 부른다.

이 베겐호프는 현재 루뱅대학을 방문하는 학자들의 사택이다. 이보다 더 훌륭한 역사교육은 없으리라. 선조들이 살던 그 공간에서 그들의 숨결과 정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으니 말이다. 마치 비둘기집처럼 좁고 작은 베겐호프의 집에서 살면서 외국인 학자들은 수도자가 아닌 자신들과 같은 세속인들이 청빈을 지향하며 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베겐호프의 정신이 현대에 되살아나는 길이기도 하다.

베겐호프에 비하면 유리벽에 갇힌 우리의 석굴암과 석굴암 부처님은 과보호 상태다. 토함산에 올라도 석굴암 내부는 고사하고 신라의 미소를 머금고 계시는 부처님조차 친견하지 못한다. 석굴 내부의 습기조절을 이유로 외부와 격리되어 있는 석굴암 부처님은 너무 쓸쓸하다. 신라 역사과학관이라는 곳에서 사진이나 영상으로만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일본처럼 전통을 박제된 상태로 박물관으로 이동시키려는 어리석은 전철을 밟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옛것을 보물로 지정한 것은 유리상자에 보관된 다이아몬드처럼 취급하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옛 선인들의 삶의 지혜가 현대인들의 삶에 빛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석굴암은 신라의 대상 김대성이 그랬듯이 현대를 사는 중생들이 석굴암 부처님의 미소에서 오탁악세(五濁惡世)의 모든 번뇌를 잊어버리고 불국토를 맛보는 신앙의 장소로 되살아나게 해야 한다.

소운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