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90) 제79화 제79화 육사졸업생들(43) 장창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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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불행한 일이었으나 1기생중 몇 사람은 좌익에 가담했다가 나중 숙군때 처단됐다.
강비원중령(전북)과 안영길(함북) 김학림(함북) 김용순(전북)소령, 김창영대위(충북)가 바로 1기생중 좌경했던 사람들이다.
김학림·강비원등은 숙군때 총살을 당했다. 김학림은 나중 사관학교의 구대장으로 발령받아 근무했는데 생도대장인 군영출신 오일균소령, 조병건소령(일 육사60기) 등과 함께 군내의좌익핵심으로 활약했다.
3기 후보생들에게 신상파악을 이유로 밤마다 불러 좌익사상교육을 실시한 것등 활동사실이 적발됐었다.
1기생중 그밖에 박근서중령은 숙군을 넘기고 6·25때 서울에 남아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기 임관자 40명중 6명의 좌익관련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이들 중에는 해방직후 우리 사회 전반이 그러했듯이 공산주의의 정세를 모른채 부화뇌동한 경우가 많았을 것으로 본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젊은 혈기 탓으로 자칫 길을 잘못들어 희생된 셈이다.
창군당시 우리 군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같은 군내의 좌우 대립이었다.
군영시절 학생들의 찬탁·반탁 충돌로 표면화된 대립은 경비대창설 이후에도 계속됐다.
여기엔 미 군정의 모호한 태도가 큰요인이 됐다. 민주국가의 인권보장과 사상의 자유등 원론적인 사고에 충실했던 미 군정은 해방직후 한국의 특수사정이나 공산주의자들의 전술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군영·경비대창설 당시 이응준고문은 미군공청 군사국 차장 「아고」대령에게 학생·대원들의 사상검토를 건의했었다. 경찰기관에 신원조회를 의뢰, 사상이 건전한 자면 받아들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거부됐다.
「아고」 대령은 『군별국가와 같이 사군조직을 만드는 보스만 경계하면 별로 두려워할 것없다. 경비대에는 정보기구가 있으니 군부안와 질서는 잡을수 있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장군은 나중 두고두고 이를 아쉬워했는데 그때 이장군의 건의가 받아들여졌더라면군의 월북·반란·숙군같은 불행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미측의 이같은 방침으로 군영에도 최남근(만군츨신·중령) 조병건(일육사60기·소령) 김종석(중령) 오일균(소령) 최상빈(소령) 오규범(중령) 나선(일군소위·소령) 등 좌경 군사경력자들이 상당수 입교하게 됐었다. 이들은 건군후 각 연대에서 좌익세포를 조직하는등 활동하다 모두 숙군때 처단됐다.
경비대원들도 군번을 받고 입대할때 미군대대장 앞에서 『불편부당, 장래 합법적으로 수립되는 정부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선서를 해야했다. 사병들에겐 이 「불편부당」이란 말이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좌도 좋고 우도 좋다는 뜻인지….
경비대 사병으로 들어온 사람들 중에는 국군준비대등 좌익 사설 군사단체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군은 자체 안에 폭약을 안고 출발한 셈이다.
군내에서 좌익세력이 가장 드셌던곳은 대구의 6연대였다.
초대 중대장으로 부임한 김영환참위(소위)가 좌익 중대원들에게 집단구타를 당하고 중대장 임무를 포기, 서울에 돌아온 사실은 어제 얘기했거니와 후임으로 간 원기섭참위(군영출신)도 곤욕을 치렀다.
원참위가 부대에 부임해보니 내무반에 신발자국이 낭자했다. 신발을 신고 드나들고 청소를 하지 않는 증거였다. 원참위는 내무반 청소에서 부대군기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하고 군화를 벗고 출입하게하고 계급에 따라 기강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불만을 품은 좌익하사관들이 어느날 밤 원참위를 내무반으로 불렀다. 『김영환참위가 왜 쫓겨났는지아느냐. 군대를 일본식, 미국식, 소련식 어느 식으로 만들겠느냐』고 위협적으로 묻더라는 것이다. 원삼위가 『도대체 사병들이 장교를 오라가라하는 군대가 어디 있느냐. 김참위를 때린 놈이 누구냐』고 장작을 집어들고 위엄을 보이자 기세가 누그러져 겨우 집단폭행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
좌익 사병들은 신병이 들어오면 『너 경비대 들어오기 전에 무슨 단체에 있었느냐』고 물어 가입단체가 우익이거나 없으면 무조건 때리고 좌익단체라면 환영하는 정도여서 순수한 신병들도 분위기에 휩쓸려 좌익이 되고 마는 판국이었다.
6연대에선 한때 내무반에 불온비라를 공공연히 붙여두고 애국가중 『대한사람 대한으로』 를 『조선사람 조선으로』로 바꿔 부를 정도였다.
군내의 좌익세력은 반미·반우익 선동과 모략을 펴는 한편 초창기 관계가 미묘했던 경비대와 경찰을 이간하고 충돌을 유발하는데도 힘을 기울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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