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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⑧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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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시 - 송재학 '붉은 기와'

피렌체의 지붕은 붉은 기와, 죄다 붉은색이니까 색감이 흐려져서 흰색의 얼룩이 생긴다 붉은색은 홍채의 북채색이다 석조 건물에 박혀 차츰 희미해지는, 햇빛이 쏘아올린 화살촉 일부는 아직 파르르 떨고 있다 그런 건물은 3층까지 어둡다 햇빛 때문에 길이 더 좁장해진 거와 다르지 않다 가령 바닥도 돌인 골목길을 몇 시간쯤 걸었다면 햇빛을 짓이긴 발바닥은 부르트는데, 그건 싸움의 흔적이다 햇빛과 싸우지 않으려면 햇빛처럼 강렬해야 한다면서도, 붉은 기와들은 종일 하품한다 게을러지기 위해 눈부신 햇빛 속에 가만히 있어본다 손톱에서부터 차츰 녹아가는 육체가 있고, 그건 내 마음이나 또 무언가 연결되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니까 붉은 기와란 건 햇빛에 바짝 구워진 물상이다

(작가세계 2004년 겨울호 발표)

◆ 약력

▶1955년 경북 영천 출생 ▶86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얼음시집'(88년) '푸른빛과 싸우다'(94년)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97년) '진흙 얼굴'(2005년) ▶김달진문학상(94년) ▶미당문학상 후보작 '붉은 기와' 외 8편

덧칠 두꺼운 유화처럼 중층적인 감각의 미학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의 '파라솔을 든 여인'이란 작품이 있다. 햇볕 따가운 한낮 흰 드레스 입은 여인이 파라솔을 들고 서있다. 드레스 앞자락에 드리운 그늘로 미뤄 해는 여인의 뒤통수 위에 떠있다. 드레스 자락을 들여다본다. 주름으로 그늘진 곳은 다소 어둡고 햇빛에 노출된 곳은 환하다. 그러나 파란 하늘과 비교하면 똑같은 흰색일 뿐이다.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덧칠을 했냐로 털끝만한 차이가 생길 뿐이다.

프랑스 화가 얘기로 기사를 시작한 건 송재학이라는 시인의 생소한 미학을 말하기 위해서다. 숱한 평론가들은 말한다. 그의 시는 이해하려 들지 말 것. 한 폭의 그림을 보듯 감상할 것. 찬찬히 뜯어보기는 하되 해석하려 들지는 말 것. 혹여 한두 줄이 짐작된다고 안심하지 말 것. 그는 속내를 드러내면서도 속내를 감추는 시인이다.

"나에겐 사물이 이미지나 풍경으로 다가온다. 처음부터 정해진 의미는 없는 셈이다. 덧칠 두꺼운 유화로 말하자면 맨처음 칠한 색깔은 맨마지막 물감에 덮여 있다. 그러나 어떻게든 투영돼 있다. "

시인의 말마따나 그의 시는 중층적이다. 심사위원들이 "감각의 미학주의를 추구하면서 견고한 구조를 만들어낸다(박수연)"고 말하는 이유다. 하여 시는 난해하다. 쉽게 쓴 시가 아닌 만큼 쉽게 읽히지도 않는다. 작품 수가 많지 않은 것도, 깊고 오랜 사유를 거쳐야 시가 나오기 때문이다. '덧칠'이란 표현은 그를 이해하는 실마리다.

시 '붉은 기와'는 시인이 지난해 이탈리아 피렌체를 여행한 경험에서 비롯됐다. 도시의 건물 지붕이 온통 붉은색이었다. 햇빛이 붉은 지붕을 비추면서 도시 이미지는 한결 강렬해졌고. 그 순간을 포착했다. 인상주의 기법이지만 시에선 피렌체 사람이 살아온 모양이 설핏 보인다. '붉은 기와'를 얹기 위해 기와를 굽고 물감을 칠한 세월, 거기에 기와가 햇빛에 바짝 구워지는 세월까지 시는 말하고 있다.

시인은 "경주에 있었다면 '검은 기와'란 시를 썼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의 속내를 눈치챘다면 당신은 대단한 수준의 독자다.

손민호 기자

소설 - 은희경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

◆ 작품소개

출판사를 운영하는 중년의 나. 누구보다 바쁘고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그러던 어느날 사무실에서 소설 원고를 발견한다. 제목은 '1991년의 코스모나츠'. 구 소련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에 관한 이야기다. 그 시절을 여태 잊고 살아왔던 나, 소설을 읽으면서 그때의 낭만과 좌절을 되돌아보게 된다. 소설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하루 동안의 일. 그러나 15년 전 시간과 수시로 오고간다.

(창작과비평 2005년 여름호 발표)

◆ 약력

▶1959년 전북 고창 출생 ▶95년 동아일보로 등단 ▶장편 '새의 선물'(96년) '마이너리그'(2001년) '비밀과 거짓말'(2005년) 등, 소설집 '타인에게 말걸기'(97년)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99년) 등 다수 ▶동서문학상(97년), 이상문학상(98년), 한국일보문학상(2002년) ▶황순원문학상 후보작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

'젊음이 부럽지 않은 중년' 여전히 신랄하고 냉소적인 …

짐짓 위악스러운 화법은 역시 은희경의 전매특허다. 출세작 '새의 선물'에서 이미 세상을 다 알아버린 12세 계집애의 당돌한 말투가, 이번 소설에선 세상을 정말 다 살아버린(살아버렸다고 스스로 여기는) 중년 남자에게서 발견된다.

'세상 사는 일에 익숙해진다는 것이 어쩌면 틀을 갖는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일종의 삶의 매뉴얼 말이다. 아무리 복잡한 일도 틀에 집어넣으면 단순해져 버린다.'

'나는 젊은이들을 그리 부러워하지 않는다.… 젊음으로 되돌아가서 그 힘든 과정을 되풀이해 다시 이곳으로 오는 것보다는 이 지점에서 내가 가진 것을 충분히 누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나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늙어가는 사람들은 자기연민이 많고 따라서 점점 고독해질 수밖에 없다.'

젊음을 부러워하지 않는 중년, 전혀 새롭지 않을 내일을 절망하지 않는 중년은 흔치 않은 캐릭터다. 이번 주인공도 만만치 않게 독하고, 신랄하고, 냉소적이다. 심사위원도 소설의 독특한 설정에 주목했다. '이런 후일담을 읽어본 기억이 없다. 지난 시대를 이야기하면서도 자기연민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후일담이다(김미현).'

작가는 미국 생활을 마치고 지난해 말 귀국했다. 그리고 처음 발표한 단편이 이 작품이다. 햇수로 3년 만의 단편이다. 귀국하고 그는 "90년대 문학이 과거의 것으로 치부되는 요즘 문단 분위기에 사실 놀랐다"고 털어놨다. 그 부담과 고민의 나날을 보내면서 이 소설을 썼다. 주인공에게서 자꾸 작가가 겹쳐진 이유를 이제는 알겠다.

두 대목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하나는 소설 속 소설. '구 소련이 쏘아올린 우주선에 탄 우주인이 지구로 귀환했을 때 조국은 사라진 뒤였다'는 내용의 소설 초고다. 주인공을 15년 전 시간으로 되돌리려는 단순한 장치로 여기기엔 메시지가, 울컥 치미는 듯한 아이러니가 너무 강렬하다. 다른 하나는 소설이 끝나갈 무렵 무심한 듯 던진 한 마디다. '지나간 이야기는 다시 씌어질 수 있는 것일까'.

"다시 쓰겠다는 얘기냐, 아니면 씌어지지 않는다는 얘기냐" 물었더니, 작가는 웃기만 했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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