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어르신과 젊은 작가 만나는 인천 수봉다방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동네 빈 가게를 문화공간으로 개조한 인천시 남구 수봉다방이 지난달 30일 문을 열었다. 청년 작가들이 개소식에 모여 얘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청년 작가 모임]

9일 낮 12시 인천시 남구 숭의동 수봉영산마을 입구. 다닥다닥 붙어있는 낡은 주택들 사이로 ‘수봉다방’이란 작은 간판이 걸린 2층 집이 눈에 들어왔다. ‘다방커피 500원, 유자차·대추차·생강차 1000원’. 안에 걸려 있는 차림표만 보면 영락없는 ‘다방(茶房)’이다.

 하지만 분위기는 여느 찻집과 달랐다. 곳곳엔 아기자기한 그림들과 다양한 설치 미술작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그냥 커피도 마시고 그림도 보면서 친구들과 수다 떠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는 게 ‘다방 단골’ 박용식(85) 할아버지의 설명이다.

 이곳은 몇년 전만 해도 30대 중반의 젊은 부부가 운영하던 흔한 동네 수퍼마켓이었다. 하지만 2006년 이후 정비예정구역 지정과 해제가 반복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주민들은 하나둘 마을을 등지고 떠났고 수퍼마켓도 주인이 떠난 뒤 빈집이 됐다. 마냥 방치된 빈집은 쓰레기장으로 변했고 노숙자와 비행 청소년의 아지트로 활용되면서 주민들의 민원이 끊이질 않았다.

 이때 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청년 작가들이 “빈집을 문화공간으로 만들어 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남구가 청년문화 지원사업으로 운영 중인 주거형 레시던시 ‘그린빌라’에서 활동하는 청년 작가 20여 명이 흔쾌히 동참하고 나섰다. 남구청도 주민 공동이용시설로 활용하기 위해 빈집을 사들인 뒤 청년 작가들에게 운영을 맡겼다.

수퍼마켓 떠난 자리 휴식공간으로 빈집으로 방치됐던 인천시 남구 수퍼마켓(왼쪽)이 수봉다방으로 바뀐 모습(오른쪽).

 지난달 30일 수봉다방은 이렇게 문을 열었다. 작가들은 빈집을 문화공간으로 꾸미는 한편 각종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주민들과 함께 소통하는 장소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작품이 박혜민(30·여) 작가의 ‘밥 먹고 가세요 #1 부대찌개’다. 부대찌개 재료인 돼지고기와 김치·라면·양파 등을 그린 작품을 주민들이 가져온 실제 재료들과 맞바꾸는 물물교환 퍼포먼스다. 작가들은 이렇게 모인 음식 재료로 10일 직접 부대찌개를 끓여 주민들과 나눠먹을 예정이다.

 김가람(30·여) 작가는 ‘무료 헤어 커트’ 퍼포먼스를 선보일 예정이다. ‘그냥 미용 봉사하는 것 아니냐’고 묻자 김 작가는 “단지 주민들 머리를 다듬어주는 게 아니라 퍼포먼스를 함께하면서 예술이 결코 어려운 게 아님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위해 요즘 미용학원에 다니며 커트 기술을 익히고 있다. 김보리(30·여) 작가는 아예 거리로 나섰다. 동네 골목골목마다 만나는 주민들에게 커피를 타주며 수봉다방을 열심히 홍보 중이다.

 주민들 반응도 좋다. 매일 다방을 찾는 단골도 그새 20여 명 넘게 생겼을 정도다. 마을 주민협의회 간사 채수준(52)씨는 “수봉다방을 한번이라도 가본 사람은 젊은 친구들이 또 어떤 아이디어를 낼까 궁금해서라도 또 찾게 된다”며 반겼다.

빈집 허물어 주차장으로 인천시 부평구 십정동의 빈집(왼쪽 셋째)도 주차장으로 변했다.

 부평구의 빈집 활용 프로젝트도 주민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부평구는 최근 산곡동과 십정동에 공용주차장 2곳을 개장했다. 빈집 4채를 헐고 차량 10대가 주차할 수 있는 조그만 주차장을 조성했는데 온종일 빈 공간이 없을 정도로 인기다. 부평구 관계자는 “이들 동네에는 별도의 주차장이 없어 주민들 대부분 골목길에 이면주차를 해야 했다”며 “이로 인해 주민들끼리 시비가 붙는 일도 잦았는데 주차장이 생기면서 이런 모습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이 주차장은 부평구가 추진하는 ‘한 뼘의 행복’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 정비구역 내에 방치된 빈집을 작은 도서관이나 쉼터·주차장 등으로 활용하는 사업이다. 처음엔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붕괴 위험이 큰 빈집에 가림막을 설치하는 정도였지만 주민들의 아이디어가 잇따르면서 본격적으로 빈집 활용에 나서게 됐다.

 현재 남구와 부평구에 있는 빈집은 330여 채와 550여 채. 이들 구는 내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빈집을 청소년 공부방과 도서관·북카페·놀이방 등 문화·교육 공간으로 탈바꿈해 나갈 계획이다.

최모란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