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즈네프의 추종세력 버텨 안드로포프 1인 체제 못 굳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지난 이틀, 소연방최고회의가 열리는 동안 세계의 관심은 신임 공산당 서기장「유리·안드로포프」 의 국가원수직 겸임여부에 모아졌다.
첫날회의에서 그가 39인 간부회의 한사람으로 뽑힌 점을 들어 대부분의 관측통들은 겸직이 확실하며 빠른 속도로 권력의 l인 집중이 이루어지리라고 점쳤다.
그러나 최고회의는 예상을 뒤엎고 간부회의장(국가원수)를 뽑지 않은 채 모임을 끝내버렸다.
「브레즈네프」사망 후 들어선 새 지도부의 제1인자가「안드로포프」임은 그가 당서기장직을 손쉽게 차지함으로써 이미 뚜렷해진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국가원수직 겸임여부가 관심을 끈 까닭은 그 결과에 따라▲「안드로포프」가 얼마나 힘을 모으고 굳혔는가를 가늠할 수 있으며▲앞으로 소련의 지도체제가 집단지도형태를 취할지,1인 중심 쪽으로 나갈지를 점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소련정치사를 보면 당권을 장악한 사람(서기장 혹은 제1서기) 은 권력을 굳히고 경쟁자들을 제압한 후에 수상이나 국가원수 등 다른 권력의 자리를 하나씩 겸하곤 했었다. 첫 지도자「레닌」은 인민위원회(내각) 의장직하나만 맡았었지만(당 서기국은「레닌」이 죽기2년 전인 22년에야 생겼으며 처음부터『스탈린」이 서기장이었다),「스탈린」과「호루시초프」는 수상을 겸했고, 64년 당 서기장이 된「브레즈네프」는 13년 후인 77년부터 국가원수를 겸했다. 국가원수직은 실권은 거의 없지만 겸직한 당 서기장에겐 지도자로서의 권위와 위엄은 보태주며, 의전상 아무런 걸림 없이 외국지도자와 만나고 국제조약에 서명할 수 있는 등의 실용적 이점이 있다.
최고회의모임이 국가원수선출을 미룬 채 끝낸 것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는 아직「안드로포프」에겐 홀로 권좌를 모두 휘어잡을 힘이 없으며「안드로포프」와「콘스탄틴·체르넨코」를 주역으로 한 크렘린의 권력투쟁은 끝나지 않았다는 분석이다. 또 하나는 권력을 강화해야할 시기에 국가원수직을 맡게 되면 번거로워지므로 본인의 의사에 따라 당분간은 공석으로 비워놓은 후 금년 말이나 내년 봄 최고회의가 다사 모일 때 취임하리라는 전망이다. 어느 쪽이든「안드로포프」가 아직 많은 제약을 받고있음은 틀림없다.
당 중앙위와 정치국·서기국엔 당권 경쟁자였으며 국가원수 물망에 올랐던「체르넨코」를 비롯해「브레즈네프」시대의 인물들이 그대로 남아있으며 이중 상당수가 잠재적 반대세력이다. 최고회의 개회전날인 22일 열린 당 중앙위전체회의에서 결정된 지도부인사가, 기정사실이던「안드래이·키릴렌코」(정치국원·당 서기)의 해임을 확인하고 그가 비운자리를 메우기 위해 KGB출신의 새 정치국원 l명과 테크노크래트 서기국원 1명을 임명하는 최소 폭으로 그친 것도「안드로포프」가 제약을 받고있음을 시사한다. 당초 관측통들은「안드로포프」가 힘이있다면정치국에 비어있는 3∼4자리에 최소한 두 세 명의 자기사람들을 심으리라고 전망했었다.
「안드로포프」는 또 15년 동안이나 당 실무일선을 떠나 KGB에 몸담고 있었기 때문에 당 조직안에 심은 세력이 별로 없다. 게다가 「브레즈네프」 체제아래서 신분을 보장받으면 괸물처럼 변동 없이 기득권을 쌓아온 수십만의 관료들과「아파라치키」(당 정치관료)들은 경제개혁·부패추방을 부르짖고 나선「안드로포프」에게 적지 않이 저항감을 갖고 있다. 지방 당 서기들이 당 서기장 경쟁 때「브레즈네프」의 심복이던「체르넨코」를 민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초기상황들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금물이다. 처음 예상대로 소련은 적어도 당분간은 타협과 합의에 의한 지도체제를 취할 것 같지만 당 서기장「안드로프프」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제1인자」다. KBG출신의 새 정치국원「게이다르·알리예프」가 24일의 최고 회의에서 제l부수상에 임명된 것은「안드로포프」가 착착 자기체제를 구축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그는 군과 KGB의 지원도 받고있다.
18년 간 의장직을 맡았던 KGB가 그를 미는 것은 새삼 설명할 필요 없다. 군이 그를 지지하는 이유는「브레즈네프」말기의 활기 없는 지도력과 경제정책실패·부패 등에 대한 환멸 때문에「브레즈네프」노선을 이어받은「체르넨코」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있고, 보다 강한 이미지의 지도자를 바랐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안드로포프」는 또 개인적으로도 군에 줄이 닿아있다.2차 대전 중 핀란드접경·카렐로 핀 공화국에서 콤스몰(공산주의 청년용맹)서기 일을 보고 있을 때 카렐리아 전선에 배치돼「안드로포프」와 사귄 장교들 중엔「오가르코프」과「소콜로프」등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원수가 돼 국방차관을 맡고있는 막강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군의 지원은 두개의 날을 가진 칼과 같아서 길게는 부담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 군은 지원의 대가로 군비의 계속 강화를 요구할 것이고, 이런 요구는「안드로포프」가 꼭 이룩해야할 경제회복과는 어긋난다. 그렇다고 군의 영향력을 배제하려들면「안드로포프」의 위치가 위협받게 된다. 군의 힘을 업고「정당집단」을 축출했던 「호루시초프」 도 훗날 군의요구를 거부했기 때문에 축출될 때 아무런 도움도 못 받았었다.
아믛든「안드로포프」체제와 소련의 앞날은 짧게는 12월의 건국60주년직전 다시 열릴 당 중앙위전체회의와 최고회의에서의 인사결과에 따라, 길게는 군의 역할과 아파라치키의 태도 및, 세대교체를 열망하는 신진세대들의 겨름 속에서 결정될 것이다.<정춘수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