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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권력 암투는 이제부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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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난 5월 「안드로포프」가 15년간 맡아오던 KGB(비밀경찰) 의장직을 내놓고 당서기로 임명되자 서독의 한 동구전문잡지는 『소련판 복합적 「야루젤스키」가 될 것』이라고 예견 했었다. 소련군부와 KGB 및 공산당의 관계를 조정해가며 소련세력의 유지와 팽창을 계속 추진해 나갈 능력을 가진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는 얘기다.
대부분의 소련 관측통들도 지금까지 「안드로포프」의 경험과 개인적인 능력으로 보아 소련이 내외적으로 당면한 문제를 풀어 나갈만한 인물은 그 말고 다른데서 찾을 수 없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안드로포프」가 일단 서기장 직을 차지했다는 것은 이런 측면 외에도 그가 현 크렘린 지도부내에서 다른 누구보다 세력기반이 우세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당 서기장 임명이 곧 크렘린의 권력투쟁에서 그가 마지막승리를 거뒀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스탈린」 사후 지금까지의 경험이 그렇듯 소련은 제도적으로 「후계자 위기」가 있을 때마다 우선 트로이카(삼두체제)라는 탈출구를 이용해왔다.
한 사람이 당을 맡고 또한 사람은 행정부를, 나머지 한 명은 국가원수 직을 맡는 해결책이다.
「브레즈네프」가 말년에 차지했던 당 서기장 직과 국가원수 직을 처음에는 누구도 한 손에 거머쥘 수 없기 때문이다. 「안드로포프」가 일단 당을 장악했으므로 국가원수 직과 수상 직이 남게되는데 수상 직은 현 수상 「티호노프」가 그냥 지키게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지난 3년간 「브레즈네프」의 황태자로 자처하며 오랫동안 정상의 길을 다져왔던 「체르넨코」는 지금 단계에서는 명목상의 국가원수 직에 만족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현재로서는 불가피해 보이는 이런 권력안배는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새로운 권력투쟁으로 발전할 불씨를 살짝 덮어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새로운 권력투쟁은 언젠가는 전혀 미지의 인물을 정상으로 밀어 올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했을 때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흐루시초프」가 부상했던 것이 그 좋은 예다.
아직은 「브레즈네프」의 유산이 어떤 후유증을 몰고 올지, 또 그 동안 「브레즈네프」의 후광을 업고 곳곳에서 요직을 차지한 그의 추총세력들이 어떤 운명을 맞게될지 점치기 어렵다.
그들의 운명이 지난 역사적 전례와 어느 정도 합치할지는 모르지만 지금까지 사망한 당 지도자의 추총세력들이 겪은 운명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레닌」이 사망한 뒤 이른바 「레닌 이스트」들은 「스탈린」에 의해 거의가 도륙되다시피 숙청됐고 「스탈린」 사망은 그의 정책하수인들의 정치적 종말을 의미했다. 또 후계자들은 이런 숙청과 병행하여 한결같이 전임자의 격하운동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다져왔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멀지 않은 장래에 「브레즈네프」 격하선풍이 몰아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더구나 「브레즈네프」가 국내정책과 경제정책면에서 실패했던 점을 고려한다면 그럴 가능성은 더욱 높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멀지 않은 장래」의 시점까지는 「체르넨코」를 중심으로 한 「브레즈네프」 추종세력의 롤백을 위한 저항은 크렘린의 암투를 격화시킬 것이다. 「브레즈네프」의 후광을 업고 성장한 「체르넨코」가 우선 정상에 이르는데는 실패했지만 체제 곳곳에 뿌리내린 「브레즈네프」 추종세력들, 이제는 불과 며칠사이 과거의 용어가 돼버린 이른바 「드니에프르·마피아」의 살아남기 위한 투쟁도 만만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12명의 정치국원 중에 「브레즈네프」와 정치적 궤적을 같이해온 인물이 「체르넨코」를 필두로 4명이나 도사리고 있다. 수상 「티호노프」, 우크라이나 당 제1서기 「시체르비츠키」, 중앙위서기 「고르바체프」 등이 그런 인물이다.
더욱이 「체르넨코」가 장악하고있는 서기국의 총무부장 직은 지금까지 당 서기장 직으로 통하는 지름길이었다는데서 그가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 자리는 당 서기장의 책상을 오가는 문서나 정치적 토의에 올라갈 안건, 당의 인사기록을 통괄하는, 67년 「브레즈네프」가 「흐루시초프」를 몰아낼 때 갖고있던 바로 그 자리다. 「스탈린」도, 「말렌코프」도, 「흐루시초프」도 이 자리를 발판으로 당권을 장악했었다.
이런 자리에 있으면서 「체르넨고」가 「안드로포프」의 뒷전으로 물러서게 된 것은 그가 현 소련체제를 지탱하고 있는 세 기둥인 당·군부·비밀경찰 중에서 당밖에는 기반을 갖지 못하고 있으며 그나마 대규모 지역 당부를 직접 지휘한 경험은 없이 참모로서만 컸다는 것이 결정적 요인인 듯하다.
이에 반해 「안드로포프」는 세 곳에 모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1939년부터 당원생활을 해온 그는 「체르넨코」와는 달리 당내에서 순차적으로 엘리트코스를 거쳐왔다. 그는 외교관(1956년 헝가리대사), KGB의장(67∼82년)을 거치고 76년에는 명목적이긴 하지만 육군대장으로 임명됐었다. 그러나 「체르넨코」는 「브레즈네프」와의 밀착된 관계 때문에 그의 심복으로서, 또 그의 개인비서로서 권력의 핵심부에 접근한 인물이다. 정치국원으로 임명되고서도 그는 「브레즈네프」와 합께 여행하면 그의 가방을 챙겨주고 몸 시중까지 들어주는 인물이라는 짓궂은 험구까지 들어온 사람이다.
바로 이런 차이가 「안드로포프」가 「체르넨코」를 앞지를 수 있었던 요인중의 주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부드러워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강경파」로 통하는 그는 군부를 대표하는 국방상 「우스티노프」와 일단 손을 잡고있는 것 같다.
그가 KGB 의장으로 있던 시절 소련에서 간행되고 있는 『정치일기』라는 잡지는 「안드로포프」에 대해 『흔히 그를 두고 지적이고 온화하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반체제 인사들을 체포하는 것을 능사로 삼지는 않았다.
그 대신 감시를 철저히 하고 어떤 때는 대화까지 나눌 때도 있다. 그의 행동은 이처럼 자유스러운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KGB 의장에 취임한 이후의 반체제운동은 그전보다 더 위축됐다』고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그가 이런 인상을 씻기 위해 개혁을 취하는 듯한 제스처를 쓸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보다 확실한 것은 소련이 그 지배구조의 속성으로 보아 당분간 내부권력관계조정에 주력하리라는 점이다. 이리한 권력투쟁은 대외적으로 항상 소련의 세계정책이 휴면기에 들어간다는 것을 늘 뜻해왔었다. 이는 크렘린의 권력판도가 분명해질 때까지의 「브레즈네프」 노선이 계속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본=김동수 특파원】

<서방엔 자유주의자 제스처 써온 인물>
워싱턴관측통들은 「안드로포프」가 「브레즈네프」 사망 이틀만에 당 서기장으로 선임된 신속성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안드로포프」가 「브레즈네프」의 후임으로 소련공산당서기장에 선임되었다는 소식에 대한 워싱턴의 첫 반응은 『낯선 귀신보다는 낯익은 귀신이 낫다』는 수준에서 「낯익은 귀신」 정도의 안도감을 갖고 있는 듯 하다. 「안드로포프」는 나쁜 의미로든 좋은 의미로든 간에 현 소련정치국윈 12명 중에서 미국이 가장 잘 아는 인물이다.
14년 동안 KGB의 책임자로서 미국 CIA에 맞서온 존재이며 1956년 주 헝가리대사로 있으면서 부다페스트 봉기에 바르샤바 동맹군이 유혈 개입하는데도 한몫 한 냉혹한 인물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영어를 잘 구사하고 프랑스 포도주와 서양소설을 즐기며 소련지도자로서는 특이하게 현대미술을 감상할 줄 아는 등 자본주의적 속성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확실히 『낯익은 귀신』 축에 든다.
그는 지난 수년간 자기가 소련지도층 중에서는 상당히 자유주의자 축에 든다는 인상을 은밀히 서방측에 흘려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슐츠」 국무장관은 궁극적으로 누가 소련의 최고지도자로 등장하느냐에 신경 쓰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누가 새 지도자가 되든 간에 미국 측 입장을 정확히 알게 해서 오산에 의한 대결사태가 오지 않도록 예방하는 작업을 일찍부터 해왔다.
워싱턴의 평론가들은 「안드로포프」가 현 소련지도자들 중에서 가장 머리가 좋고, 투박스러운 지금까지의 소련지도자들에 비해 훨씬 세련된 인물이라는 점에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그는 과거 「스탈린」·「흐루시초프」·「브레즈네프」같은 외곬의 지도자들보다 세계문제나 국내문제에 대해 보다 폭넓은 감수성을 지니고 있을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CIA국장 「월리엄·케이시」 같은 사람은 『앞으로 소련의 대외정책이 보다 세련된 것이 될 공산이 크다』고 말했다.
국무성의 분석관 「시드니·플로스」의 말에 따르면 「안드로포프」는 국내정책면에서 과거 「말렌코프」와 「셀레핀」이 그랬던 것처럼 당 조직의 역할을 인민의 「이념적 동원」에만 국한시키고 국가운영의 실질적 분야는 실무전문가들에게 맡겨야된다는 주장을 자주 했다고 한다.
모든 분야에서 당의 주도를 요구해온 지금까지의 소련체제의 특성에 비해 분명한 수정노선이 되는 이런 「안드로프프」의 주장이 먹혀 들어가고 있음은 이미 지난 4월22일 모스크바에서 「레닌의 날」 축하행사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났다고 「플로스」 씨는 주장한다.
「안드로포프」가 주 기념연사였던 이 연례행사는 지금까지 국가로 시작해서 당가로 끝나는 것이 관례였는데 금년에는 처음과 마지막에 모두 국가만 연주했다고 프라우다 지가 보도했다는 얘기다.
당보다 국가기관을 더 중시한 이 상징적 변화가 중공에서의 등소평과 비슷한 탈 이념노선을 예고하는 것인지는 계속 두고 볼일이다.
대외정책면에서 「안드로포프」는 전략핵무기제한회담(SALT)을 핵심으로 하는 데탕트정책을 계속 주장해왔다는 그는 데탕트에 대한 소련지도자들의 열의가 식은 78년까지도 공식석상에서 70년대의 데탕트는 성공적이었다고 발언했다고 국무성 분석관은 지적했다.
그는 또 헝가리사태 이후엔 동구권의 독자노선에도 동정적이라는 평이 있다.
이와 관련해서 공산권 전문가인 「해리슨·솔즈버리」는 심지어 「안드로포프」의 등장과 동시에 폴란드 자유노조 지도자 「레흐·바웬사」의 석방이 발표된 것도 「안드로포프」의 새로운 스타일을 예고하는 것 일수도 있다고 논평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안드로포프」 등장에 대한 워싱턴의 일반적 반응에는 2가지 단서가 붙어있다. 하나는 「안드로포프」가 다른 지도자들보다 자유주의자라는 서방에서의 이미지가 일부는 「안드로포프」 자신의 지지세력에 의해 흘려진 것일 가능성이 있고 설혹 그가 자유주의적 성향을 가졌다해도 소련체제의 경직성을 고려할 때 대외정책면에서 별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그가 알려진 바와 같이 지성적이고 창의성이 강하며, 세련된 인물이라고 하면, 소련 권력투쟁의 역사에서 그런 인물은 지금까지 늘상 도태됐다는 점을 생각해야한다. 「트로츠키」를 위시해서 「말렌코프」·「셀레핀」 등이 그런 선례로 제시된다.
소련지도자들이 「스탈린」-「흐루시초프」-「브레즈네프」로 이어지는 투박하고, 본질적으로 현상유지적 인물이었다는 전통이 「안드로포프」와 같은 새로운 유형의 인물로 바꿔진다면 그것은 흥미 있는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워싱턴=장두성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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