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맛있는 월요일] 개성은 있고 부담은 없다 … 서울대 앞 '샤로수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6면


그 동네에 요즘 봉로수길이 유명하던데, 자주 가시겠네요?

우리 동네에요? 봉로수길이 뭔데요?

신사동 가로수길을 따서 봉천동의 가로수길이라고 붙인 거 같아요.

나는 봉로수길이라는 데를 떠올리고 있느라 말을 흐렸다.

봉천동에서 아직 내가 모르는 데가 있다니.

-조경란, 단편소설 ‘저수하(樗樹下)에서’(2014년 ‘문학사상’ 10월호)


서울 관악구 관악로 14길. 소설 속 ‘봉로수길’은 실재한다. 사실 이 골목은 ‘샤로수길’로 더 많이 불리는 편이다. ‘샤’는 서울대 정문 조형물(서울대 심벌) 모양에서 따왔다.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에서 가깝기도 하거니와 실제로 서울대 학생들도 이 거리를 자주 찾는다. 과거 동네 수퍼·세탁소·옷가게였던 곳이 작지만 개성 강한 밥집·술집으로 거듭나고 있다. 샤로수길이라는 근사한 이름 또한 호기심을 자아낸다. 이곳은 2008년 낙성대동으로 바뀌기 전까지 30년 가까이 봉천7동으로 불렸다. 하늘을 받든다는 뜻의 ‘봉천(奉天)’동에는 달동네가 많았다.

서울 봉천동 토박이인 소설가 조경란이 `샤로수길`을 걷고 있다. 샤로수길은 그의 소설에서 `봉로수길`로 등장한다. [강정현 기자]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샤로수길의 터줏대감은 2010년 2월에 문을 연 수제버거집 ‘저니’다. 서울대 미식동아리 ‘스누미’가 이 집을 다녀가면서 이 거리가 서울대생들에게 입소문 나기 시작했다. 김학진(38)씨는 당시 임대료가 저렴한 곳을 찾아 이 동네로 들어왔다. 수제버거를 만들기로 결심한 것은 호주 워킹홀리데이 경험 때문이다. “호주에서 이것저것 안 해본 일이 없어요. 당시에 아낀다고 햄버거만 먹었는데. 돌아와 보니깐 제가 제일 잘 만들 수 있는 게 햄버거더라고요.” 그가 손수 만드는 햄버거 패티와 소스에는 호주 생활의 쓴맛·단맛이 다 들어 있다. 그는 해외 체류 경험을 대학생들과 공유하기 위해 가게 이름을 ‘저니(Journey)’로 지었다고 했다. 가게 한쪽 벽면은 단골 학생들이 남겨놓은 사인들로 빼곡했다.

 그해 ‘막걸리카페 잡’도 맞은편에 문을 열었다. 서울대에 다니던 친구 권유로 김호연(31)씨가 이 동네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당시 이 거리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했던 친구가 인근에 원룸촌이 형성되면서 유동인구가 늘고 있다고 일러줬다. 서울대생뿐만 아니라 강남 일대로 출퇴근하는 직장인들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주거지를 찾아 이곳에 모여들 때다. 가게는 5000원짜리 막걸리와 1만원이 채 안 되는 안주로 서울대생과 사회초년생의 발길을 붙잡았다. 사실 손님 얼굴을 일일이 기억하는 김호연씨 덕분에 단골이 끊이질 않는다. “홍대 클럽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그때 ‘너만의 단골손님을 만들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그때부터 손님 얼굴을 기억하려는 습관이 생겼어요.” 그는 올해 초 인근에 ‘와인창고 잡’을 냈다. 2만원대 와인이 가장 많고 안주는 모두 1만5000원 이하다. ‘막걸리의 고급화, 와인의 대중화’가 그의 신념이다.

 샤로수길에서 이들 가게만큼 주인 성격을 빼닮은 곳도 없을 것이다. 바로 남미 음식점인 ‘수다메리까’와 일본식 선술집인 이자카야 ‘모토이치’다.

수다메리까는 남미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윤인섭(34)·박효경(31)씨 부부가 차렸다. 스페인어로 남아메리카를 뜻하는 수다메리까는 단골들 사이에서 줄여서 ‘수다’로 통한다. 실제로 가게에 들어서면 수다 떨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생소한 남미 음식에 대해 주인에게 조언을 구하다 보면 어느새 대화가 왁자지껄해진다.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서울대 인류학과 2학년 김영상(22)씨는 “샤로수길 가게는 저마다 개성이 있다. 선택지가 다양하기 때문에 싼 술집만 모여 있는 녹두거리보다는 이곳을 선호하게 된다”고 말했다. 목~일요일엔 스페인 발렌시아 출신 요리사가 음식을 만들어 준다.

 이자카야 모토이치는 이들 세 가게와는 조금 떨어져 있다. 이들과의 물리적 거리만큼 가게 주인도 조금 수줍음을 타는 편이다. 모토이치는 대학 조리과 동기인 이재훈(36)·이원일(35)씨가 2012년 문을 열었다. 두 사람은 봉천동에서 일본식 덮밥집을 내서 성공하기도 했고 카페를 열어 손해 보기도 했다. 결국 두 사람은 가장 자신 있는 일본 요리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저희가 잘하는 게 있고, 또 익숙한 동네가 있잖아요. 그래야 마음도 편하고 자신감도 생기는 것 같아요.”(이원일씨) 겸손한 듯하지만 내공이 있다는 점에서 가게와 주인이 닮았다. 가게 내부는 일본에서 공수한 포스터와 소품들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도쿄조리사전문학교를 나온 이재훈씨는 전공이 고급 연회요리인 가이세키 정식이다.

 밤이 깊어질수록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 바로 ‘모힝’이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인데 오전 2시까지 문을 연다. 20대 초반부터 푸드 컨설팅에 종사했던 박태균(29)씨가 지난해 11월 문을 열었다. 봉천동에서 초·중·고를 나온 박씨는 “우리 동네에도 제대로 된 이탈리안 레스토랑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역으로 봉천동을 공략했다”고 말했다. 문 닫는 시간이 늦은 것은 박씨 자신이 올빼미족이기 때문이다. 야근을 마친 직장인들이 귀갓길에 주린 배를 채우려 들르는 경우가 많다. 주말 오전에는 브런치도 선보인다.

 올해로 샤로수길 5년차인 ‘저니’의 김학진씨는 이 골목의 인기가 아직 얼떨떨하다. “제가 인생의 굴곡이 있어요. 20대의 저는 약간 내리막길 인생을 살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 가게를 차린 후 제 인생이 쭉 올라가기 시작했어요.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거든요. 허름했던 이 골목의 모습도 조금씩 멋지게 바뀌어 가겠죠.”

글=위문희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