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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선생의 이름을 더럽힌 죄, 씻을 수 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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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정철근 기자 중앙일보 에디터
정철근
논설위원

율곡사업. 1974년 박정희 대통령 때 시작된 방위력 증강사업이다. 박 대통령은 여러 후보 중 임진왜란 전 10만 양병설을 주창했던 이이(李珥)의 호를 따 이름을 정했다고 한다. 이 사업은 성능 좋은 무기를 국산화해 싼값에 조달하는 게 목표였다. 당시 경제 개발에도 쓸 돈이 모자랐다. 언론사까지 나서 국민 성금을 모았다. M16 소총을 양산하고 대전차로켓포, 155㎜ 곡사포 등을 국산화했다. 1차 사업의 성과로 국군이 쓰는 기본 무기 개발을 끝낼 수 있었다. 전두환·노태우 정권을 거치면서 재정 여건이 좋아지자 훨씬 많은 예산이 투입됐다. 91년부터 시작한 4차 율곡사업은 국방예산의 3분의 1을 썼다.

 율곡사업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집권하자 수술대에 올랐다. 감사원 감사 결과 군 수뇌부가 무기중개업자 등으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은 혐의가 드러났다. 전직 국방부 장관 2명, 전직 참모총장 3명,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 사법처리됐다. 일반 사병들은 군생활 내내 얼굴도 보기 힘든 고위급 장성들이 줄줄이 법정에 섰다. 국민들은 열광했다. 그때까지 성역이나 다름 없었던 군부의 비리를 도려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환호는 얼마 안 가 실망으로 바뀌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법원에서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났다. 그나마 대통령 특별사면을 통해 판결문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사면·복권됐다.

 방산 비리를 뿌리 뽑기 위한 정부합동수사반이 최근 서울중앙지검에서 현판식을 갖고 본격 수사에 들어갔다. 이어 감사원의 ‘방산비리특별감사단’이 출범했다. 이번엔 비리 혐의가 불거진 업체들뿐 아니라 최근 6년간 방위산업에 참여한 모든 업체가 대상이다. 63년 감사원 창설 이래 국방분야 감사로는 최대 규모다. 감사관 16명에 검사 3명 , 경찰청·국세청·관세청·금융감독원 직원 각 2명 등 총 33명이 투입됐다.

  베테랑 전문가들이 총동원된 만큼 방산비리를 근절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그러나 율곡사업 비리를 현장에서 취재했던 기자로서 걱정도 든다. 이번에도 솜방망이 처벌, 근본을 건드리지 못한 미봉책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다.

 방산 비리를 수사하면서 문제점은 제품을 비싸게 샀는지를 판단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군 무기라는 특성상 민간용보다 특별한 사양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으며, 가격도 비싸게 매겨진다. 하지만 민용을 써도 충분한데 굳이 군용 사양을 고집하는 게 문제다. 군용의 경우 민용보다 업체 간 경쟁이 훨씬 덜하다. ‘바가지’를 쓰거나 비리가 끼어들 가능성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90년대 말 정부가 헬기 부품을 구입하면서 민간루트보다 수십 배 비싼 가격에 도입하는 과정을 취재한 적이 있다. 원래 군용헬기를 소방·수송용으로 사용했는데 블레이드·로터·엔진 등 주요 부품은 군용과 민용의 차이가 없었다. 그때 만난 한 무기중개업자는 이런 얘기를 털어놓았다. “군장비라는 게 일부 특수목적 외에는 민용 장비와 비슷하다. 그런데 이런 저런 옵션을 붙이면 가격이 훨씬 뛰고 어떤 가격이 적정한지 비교하기 힘들게 된다.”

 2011년엔 군 당국이 시가 1만원짜리 4기가 용량의 휴대용저장장치(USB)를 95만원에 구입한 사실이 드러났다. 군용이라 훨씬 강한 내구성을 요구했다는데 일반제품보다 특별히 나은 게 없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군용이란 핑계로 구매과정을 복잡하고 폐쇄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무기를 사올 때도 우리나라는 자주 ‘봉’이 된다. 한국은 미국의 대외군사판매제도(FMS)에 따라 무기를 구매하고 있다. 구매금액 기준으로 사우디아라비아·이집트·이스라엘 등에 이어 6위 수준이다. 하지만 걸맞은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감사원 감사 결과 물품이 납품되지 않았는데도 대금을 지급하거나 미국의 청구액보다 과다 지급한 사례가 드러났다.

 이번 검찰 수사와 감사원 감사가 비리를 저지른 사람들을 처벌하는 데 그쳐선 안 된다. 왜 이런 비리가 계속되는지 원인을 찾아내고 구조를 바꿔야 한다. 나라를 지키려면 군대를 키워야 한다고 외쳤던 ‘율곡’이란 선각자의 이름이 방산 비리의 대명사로 더럽혀졌다. 모두 후손들의 잘못이다. 정권마다 되풀이되는 방산 비리를 보며 분노하면서도 부끄러운 이유다.

정철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