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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극단적인 곡면을 꿈꾼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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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호 18면

지난달 1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난 벤츠 외장 디자인 총괄 로버트 레스닉(43·Robert Lesnik·사진)은 독일 포르츠하임(Pforzheim) 대학에서 운송기기 디자인을 전공했다. 미국의 ACCD, 영국의 RCA와 더불어 자동차 디자인 명문으로 손꼽히는 학교다.

로버트 레스닉 벤츠 디자인 총괄

이후 그는 폴크스바겐과 기아차 유럽 디자인 스튜디오를 거쳐 2009년 벤츠에 입사했다. 슬로베니아 출신인 그는 독특한 인물이다.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 슬로베니아에 하나뿐인 미대에 지원했지만 3년 연속 떨어졌다. 그는 “해마다 12명을 뽑는데 각종 연줄로 합격을 보장받은 이들이 많아 경쟁 자체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잡지에서 우연히 찾은 슬로베니아 출신의 포르츠하임 대학 교수에게 스케치를 그려 우편으로 보냈다. 한번 보자는 연락이 왔다. 교수는 독일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그에게 유학을 권유했다. 그의 뛰어난 재능을 눈여겨봤기 때문이다. 1991년 그는 기계 기술자가 되길 원하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홀로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입학하자마자 그는 각 자동차 업체에 스케치를 그려 보냈다. 그의 그림 실력에 반한 폴크스바겐이 스폰서를 자청했다. 덕분에 그는 폴크스바겐에서 실무 경험을 쌓는 한편 용돈까지 받으며 대학을 마쳤다. 졸업 후엔 폴크스바겐에 입사했다. 그곳에서 피터 슈라이어, 고든 바그너 등 현재 완성차 브랜드의 디자인을 총괄하는 선배들과 인연을 맺었다.

그에게 벤츠 디자인의 전략을 물었다. 그는 “벤츠가 추구해야 할 디자인을 ‘감각적 순수성(Sensual Purity)’”이라고 말했다. 자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간결한 형태를 뜻한다. 이를 위해 그는 차체 표면의 선을 하나씩 지워 나갔다. 그런데 모든 차종에 해당되는 전략은 아니다. 현재 벤츠는 차종을 크게 세 개 그룹으로 나눠 디자인을 차별화하고 있다.

S나 E, C클래스처럼 꾸준히 진화해온 차종은 파격을 자제한다. 군더더기 없이 팽팽한 면을 지향한다. 반면 A와 CLA, GLA-클래스 등 소형차는 진보적이다. 그는 “호불호가 선명히 갈리는(Love or Hate) 디자인”이라고 설명했다. 벤츠가 최근 공개한 메르세데스-AMG GT(위 사진)는 ‘비율(proportion)’에 중점을 둔 스포츠카다. 20세기 초 벤츠 경주차의 윤곽을 고스란히 계승했다. 그는 “벤츠 디자인엔 철학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아울러 “감각적 순수성과 극단적인 곡면은 이번 세대만의 특징이며 다음 세대엔 또 다른 테마로 바뀔 것”이라고 밝혔다. 그에게 벤츠 디자인의 핵심을 꼽아달라고 했다. 그의 대답은 명료했다. “한눈에 벤츠라는 사실을 알 수 있고, 벤츠만의 뚜렷한 정체성을 느낄 수 있어야 해요.”

디자인하는 데 부담을 많이 느끼지 않는지도 궁금했다. 그는 기아차 시절의 경험을 소개했다. “당시 남양만 디자인센터를 방문할 때마다 한국인 동료가 자동차 디자인은 너무 힘든 직업이라고 말하는 걸 들었어요. 제 생각은 달라요. 전 지금도 매일 아침 출근할 때마다 가슴이 설레요. 자동차 디자인은 감성적이고 창의적인 일이에요. 자유가 필요합니다. 압박감을 느끼며 일하는 디자이너에게서 좋은 디자인을 기대할 수 없는 이유지요.”

샌프란시스코=김기범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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