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벽돌문화속의 개성(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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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편지 글씨만 해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 글씨 하나하나는 모두가 벽돌장과도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은 붓이 아니라 볼펜인 까닭입니다.
그렇지요. 옛날 사람들은 붓으로 글씨를 썼읍니다. 그 보드라운 모필끝에서 묵향과 함께 하나씩 태어나오는 글씨들은 작은 풀잎, 작은 꽃잎과도 같습니다.
잘쓴 글씨든 못쓴 글씨든 붓으로 씌어진 글씨에서는 생명의 흐름을 읽을 수가 있지요.
붓은 끝이 부드럽기 매문에 쓰는 사람의 영혼을, 의지를 그리고 그 생명적인 리듬을 글씨의 한 획마다 옮겨 놓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 일자 하나라도 그것은 그냥 가로 그은 선이 아니라 붓을 대고 끌고 뗀 삼박자의 숨결이 있읍니다.
이를테면 힘의 강약과 속도의 늦고 빠름을 섬세하게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붓으로 제일 쓰기 힘든 것은 자로 대고 그은 것 같은 직선일 것입니다.
그렇지요. 붓글씨와 가장 대극적인 글씨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벽돌처럼 찍혀 나오는 글씨, 기하학적인 직선과 일정한 규격을 갖춘 그 인쇄활자일 것입니다. 사람의 손과 얼굴이 자취를 감추어 버린 글씨입니다. 더 이상 거기에서는 「쓴다」는 의미를 찾아 낼 수가 없습니다. 죽어버린 글씨입니다.
「쓰는 행위」가 「찍는 행위」로 바뀌는데서 활자문명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서도가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나는 연필의 시대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쓴다는 행위가 한 순간 속에 자신의 모든 생명을 쏟아 붓는 것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읍니다. 손끝이 아니라 온몸으로 글씨를 쓰는 그 자리에서만 영혼은 하나의 형태로 번역될 수 있을 것입니다.
추사의 서론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글씨는 붓에서 이루어지고 붓은 손가락으로 움직여지고 손가락은 손목으로 움직여지고 손목은 팔뚝에서 움직여지고 팔뚝은 어깨에서 움직여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그리고 어깨를 움직이려면 좌우의 몸통을 움직여야하고, 그 몸통을 움직이려면 몸의 상체에서 움직여지고, 상체는 몸의 하체에서 움직여지고, 하체는 또한 두다리에서, 두다리는 땅을 디딜 때 발가락과 발꿈치를 끌어내려 나막신굽이 땅에 박히는 것처럼 되어야 움직여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추사는 온몸으로, 온 영혼으로 붓을 잡고 있었던 것이지요. 마치 한 나무가 이파리와 꽃을 피우기 위해서 대지에 그 뿌리를 튼튼히 박고 있는 것처럼, 추사의 글씨 속에서 피어나는 그이파리와 꽃잎은 손끝이 아니라 땅을 디디고 있는 발가락으로부터 솟아난 것입니다.
붓은 본시 붓대의 맨위를 잡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야 전신의 힘을 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시대가 흐를수록, 그리고 일본같은 나라에 오면 붓을 잡는 위치가 점점 밑으로 내려가면서 붓의 문화는 서서히 죽어가는 것입니다.
국민학교에서 맨처음 습자를 배울 때, 으례 선생님으로부터 야단을 맞게되는 것도 바로 붓을 쥐는 방법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연필을 쥐듯이 그렇게 붓을 쥐고 글씨를 썼던 것입니다. 붓의 문화가, 말하자면 오랜 동양의 문화가 서양의 새 문명밑에서 죽어가고 있던 시대에 태어난 아이들은, 딱하게도 손가락 끝으로밖에는 글씨를 쑬 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펜이었든 연필이었든, 비록 손끝으로 쓰는 글씨일지라도, 거기에는 아직 힘의 강약과 속도 같은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잡고있는 이 볼펜에 비하면 말입니다.
잠시 쓰던 글씨를 멈추고 볼펜을 가만히 들여다 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으로 쓴 글씨의 모양을 한번 조심스럽게 살펴보십시오. 볼펜은 본래「볼 포인트 펜」이라고 불리었듯이 펜 끝에 둥근 볼(구)이 달려 있는 펜인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약1백년 전에 미국의 「라우드」가 발명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오늘날처럼 널리 보급된 것은 헝가리의 신문기자「비롱」이 그것을 개혁하고 난 (1941년) 2차대전 후의 일입니다.
볼펜으로 글씨를 써 보십시오. 그리고 붓글씨와 비교를 해보십시오. 펜촉대신 작고 둥근 볼이 저절로 굴러가면서 미끄러지듯이 씌어져가는 볼펜[오직 빨리 써진다는 그 기능밖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는 볼펜-정확하게 말해서 그것은「쓴다」기 보다는「굴린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지 모릅니다. 볼펜은 생명의 불량도체인 것입니다.
붓이 펜이 되고 연필이 되고 그것이 볼펜으로 바뀌어갔다는 것은 사회와 문화가 벽돌장으로 화해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볼펜도 사라져 갈 것입니다. 전자타이프 라이터가, 컴퓨터의 워드 프로세서가, 추사의 공간을 메울 것입니다.
글씨는 단지 의미만을 쌓아가는 벽돌장 같은 기능만 갖고 있으면 됩니다. 복사시대의 문화속에서 글씨를 쓴다는 것은 벽돌을 쌓는 일과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읍니다.
글씨가 담고있는 의미공간에 생명의 달무리 같은 것, 인격의 아지랭이 같은 것을 느끼던 시대는 붓의 문화와 함께 종언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독자성은 낡은 말이기는 하나「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거꾸로 찍힌 활자의 운명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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