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노트] 영화 대본 뼈대로, 소설 쓰는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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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문학은 본래 문화의 근본이다. 아니 근본이었다. 이렇게 과거형으로 시제를 바꿔 본다. 어찌 보면 매우 흥미롭고 달리 보면 매우 논쟁적인 장편소설 한 권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작가 김형경(44)씨가 문학과지성사(문지)에서 펴낸 소설의 이름은 '외출'. 다음달 개봉하는 배용준.손예진 주연의 멜로영화와 제목이 같다. 이름만 같은 게 아니라 줄거리도 같다. 소설은 영화의 시나리오를 원작으로 삼았다.

사실 이와 같은 시도는 처음이 아니다. 그러나 이전엔 영화 홍보를 위해 영화사가 기획하거나 시나리오 작가가 작업한 게 대부분이었다. 이제껏 문단은 이러한 기획소설을 '문학'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다르다. 펴낸 곳이 '문지'다. 30년 동안 '창비'와 함께 한국 문단을 이끌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출판사가 원작자(허진호 감독이 시나리오도 썼다)에게 거액의 원작료를 지불하고, 작가에게 소설 집필을 의뢰한 것이다. 지은이 또한 20년 동안 순수문학을 추구해온 문단의 중진이요 인기작가다. 작가의 생각을 들었다.

"새로운 문화 형성의 시발점이라고 판단했다. 시나리오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지금은 내 소설이라고 단언한다. 소설이 원작인 영화를 종속 예술이라고 부르지 않듯 이번 소설 또한 하나의 고유 예술이다. 문학이 침해당했거나 위상이 깎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출판계에선 우선 놀랍다는 반응이다. 소설을 읽은 뒤 판단하자며 유보적인 자세를 보인 출판사도 있었지만 부정적인 의견이 우세했다. '작품의 독창성은 문체뿐 아니라, 발상의 독창성도 중요하다. 따라서 이번 소설은 독창적인 문학, 다시 말해 본격문학으로 바라보기 어렵다''문지가 상징했던 고급문학이 상업적인 대중문화로 스스로 흡수된 사건이다'등등.

영상의 시대에 문학이 새로운 활로를 찾은 것인지, 한류에 기댄 노골적인 상술인지 현재로서는 알 길 없다. 여하튼 확실한 건 문학의 위기가 날로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며, 이번 소설은 활자 미디어가 자발적이고 공식적으로 영상 미디어로부터 콘텐트를 이식받은 첫 사례로 기록될 것이란 사실이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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