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제」연기…뒤따를 난제들|풀린 돈 거둬 들이는게 가장 큰 과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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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실명제연기를 둘러싼 진통이 예상외로 컸던 것처럼 이의 뒤치다꺼리에도 까다롭고 어려운 문제들이 널려있다.
내년부터 내리기로 약속했던 세금을 언제 그랬더냐는 듯 끌어 올려야 하고 나라살림살이도 다시 짜야한다. 이미 풀어버린 통화는 어떻게 거둬들이며 투기자산으로 몰리고있는 돈을 은행창구로 끌어들이기 위해 금리정책은 어떻게 조정해야할지 걱정이 태산이다.
이들 정책의 밑바탕이 된 실명제가 쏙 빠짐으로써 전반적인 경제운용계획의 수정이 불가피하다.

<출자 기피 현상> 제2금융권 확충
금융거래의 실명화계획과 함께 정부가 맨 먼저 들고 나온 것이 제2금융권의 활성화였다. 사채시장의 음성적인 자금이 단자회사나 상호신용금고 등의 신규설립에 쓰인다면 일체의 자금출처조사는 면제하겠다고 실명법안에 못 박혀있다.
정부의 이러한 약속에 따라 이미 8개의 단자회사 및 10개의 상호신용금고가 내인가 까지 받았으나 실명제실시가 연기됨으로써 그 운명을 가늠하기 어렵게 됐다. 그러나 이미 내인가를 내준 단자회사나 상호신용금고는 실명제 연기에 불구하고 정식허가를 안 할 수 없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다. 지금도 경쟁이 심한데 신참들이 대거 참여함으로써 제2금융권의 경쟁은 보다 치열해질 것이 예상되나 그것은 자유경쟁에 맡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단자회사출자자금의 자금출처조사여부는 아직 미정이나 당초 방침대로 안 하는 방향으로 기울고 있다.
신규 단자회사 등에 참여키로 했던 사채업자들은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탐지라도 한 듯 출자를 기피하며 자취를 감추기까지 해 발기인대표들을 당황하게 만들고 있다.
이에 덩달아 신규 단자회사에 스카우트되었던 기존 단자회사 임직원들은 정부의 본인가가 제때 나올지 몹시 궁금해하며 후회막급한 표정들이다.

<무기명 낮출 듯> 차등과세
실명제가 연기된다 하더라도 무기명과 실명예금과의 차등과세는 당초 방침대로 실시하여 실명화를 유도해간다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이는 소득세법의 개정으로 가능하다.
원래는 내년 7월부터 실명은 10%(각종세금제외), 무기명·가명은 30%씩 차등 과세키로 했으나 가명예금에 대한 세율이 너무 높아 오히려 이들 예금이 은행창구를 기피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차등세율 폭을 내년에는 이보다 더 좁히고 일정기간이 지나면 이를 순차적으로 넓히는 방안이 검토되고있다.
실명제를 연기해도 실명제를 포기한 것은 아니므로 차등과세라는 경제적 유인에 의해 실명제를 유도하겠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실명 10%, 무기명 30%의 세율차이는 너무 응징적이어서 무기명을 15∼20%정도로 낮춰야 한다고 보고 있다. 금융단 협정에 의한 신규예금의 실명화도 검토했으나 그것은 「실명화 연기」취지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당분간 안 하기로 했다.

<고소득층 높여> 세율조정
실명제실시로 새로운 세원이 노출될 것으로 보고 세율을 인하했던 소득세·법인세·상속세 등 직접세는 어차피 손질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대로 두면 세입감소로 재정적자폭은 더욱 커진다.
개정소득세법은 최고세율을 현행 60%에서 50%로 낮추었으나 고소득층에 대한 지나친 배려가 여전하다는 여론에 따라 세율을 더 높일 것으로 보인다.
배당소득이 분리 과세되는 소액주주의 범위는 현행과 같이 자본금의 1% 또는 주식액면가 1억원 중 적은 금액이 될 가능성이 높다.
실명제와 직접 관련 없이 기업부담완화를 겨냥해서 취해졌던 법인세율은 개정안보다 각각 5%씩 올려 과표 5천만원 미만의 법인은 25%, 5천만원 이상의 법인은 27%로 올리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상속세는 대폭적인 인적공제액 인상과 세율인하에도 불구하고 실명제실시로 자산이동 상황이 모두 드러나 내년에 세수가 1백 15%나 늘어나는 것으로 예산이 잡혀있으나 실명제가 연기된 이상 그렇게 공제액 등을 높일 수 없다는 것이 정부의 방침. 증여세도 마찬가지다.
정부와 여당은 각종 5천 5백억원이나 되는 내년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세율을 현재 제출되어있는 것보다 높인다는데 일단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저세율·저감면원칙에 한계가 있다고 본 것이다. 이에 따라 83년 예산안도 세입·세출 모두 조정해야한다.

<증시 이미 활기> 증권·부동산
실명제실시 연기설이 나돌기 시작하면서부터 주식 시장은 이미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오히려 지나치게 과열되고 있다고 판단되었던지 재무부는 증권회사들에게 고객들의 매수오퍼만 취급하고 회사자체의 주식매입은 중지토록 지시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그렇더라도 소액주주범위축소와 실명제실시로 말미암아 떨어졌던 주가가 실시연기가 확정적인 바람에 다시 회복될 것은 틀림없는 일이고 여기에 상당한 가속까지 예상된다.
반면 극성을 부리기 시작한 부동산투기도 다소 누그러질 가능성도 있다.
저금리를 외면했던 돈들, 실명제를 꺼렸던 돈들이 환류될 경우 부동산 투기는 자체 소화될 수도 있다.
예컨대 실명제 시비가 일기 시작한 지난주부터 7·3조치 이후 주식을 팔고 부동산 쪽으로 몰려갔던 증시의 큰손들 상당수가 다시 돌아왔다는 것이 시장주변의 이야기다.

<대기성화 기미> 통화운용
정부가 부닥친 난제 중 하나는 통화환수다. 지난 6월 장 여인의 거액어음사기사건으로 사채시장의 활동이 위축되자 올해 총통화목표를 20∼22%에서 25%로, 그리고 다시 30%로 대폭 확대, 앞장서서 통화공급을 늘렸다. 7·3조치의 충격으로 단자시장이 위축되면서 중소기업 뿐만 아니라 부실 건설업체까지 모두 은행에 목줄을 대고 살아왔다.
총통화 30%중 6∼7%는 거래가 마비되었던 사채의 빈자리를 메워주기 위해 나간 돈이라고 설명되었다.
그래서 총통화 증가율은 30%가 넘는데 이를 어떻게 수속하느냐가 큰 과제다.
실명제발표 후 돈이 많이 풀렸으나 옛날처럼 은행저축성예금으로 되돌아오지 않고 요구불예금으로 대기자금화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이 돈이 한번 움직이면 또 한번 큰 투기바람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이미 개포아파트 열풍 등이 그런 조짐이다. 따라서 이 돈을 달래서 제도금융으로 끌어 들여야한다. 그러나 실명제로 놀라고 저금리로 유인이 없어 좀체 끌어넣기가 힘들 것이다. 우리나라의 금융체질상 연말에 들어 통화를 환수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늘어난 돈을 이대로 두면 인플레의 위험이 있다.
금융부문에 돈이 많이 풀렸으면 재정에서 빨아들여야 하는데 지금은 재정에서 돈이 더 터지고 있다. 현재 정부의 가장 큰 고민도 바로 이것인데 금년엔 총통화증가율을 더 이상 안 늘리는데 주력하고 내년부터 긴축을 통해 통화를 줄여간다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다.

<손대야할 금리> 사애와 금리
사채금리가 오르고있는데 이는 긴축과 더불어 더 오를 가능성이 많다.
따라서 현재의 은행금리 8%(l년 만기 정기예금기준)와 실제금리와의 격차는 더욱 벌어질 수밖에 없다.
양성화된 사채라고 할 수 있는 CP(신종기업어음)의 최고금리가 연14%선인데 사채금리는 이것의 갑절수준이다.
사채거래가 활발해짐에 따라 기업들의 급전조달은 지금보다 수월해지는 반면 사채금리와 은행금리사이의 이 같은 괴리현상은 더욱 심각해지게 됐다.
그렇지 않아도 비현실적이라고 비판받아온 현재의 저금리체재는 더 이상 견뎌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낮은 금리를 현실화해야한다는 논의도 정부·금융가에서 이미 나오고 있다. 연내에 2%정도 올리고 내년의 동향을 보아 더 올려야한다는 주장이다.
또 현재 12∼14%로 되어 있는 CP와 9.5∼12.5%로 제한되어 있는 회사채 발행금리 자율변동폭을 현실에 맞게 상향조정하자는 논의도 나오고있다.
단자회사와 상호신용금고들의 신규설립자유화를 개기로 이들의 금리자율화를 과감하게 실천에 옮기자는 주장도 있다.
제2금융권 금리를 상향조정할 경우 결국 은행금리도 시기가 문제지 2%정도 인상은 불가피할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금리조정에 대해선 매우 경직성을 보이고 있다. 경제적으로 보아선 금리를 올려야할 추세인데도 「체면」을 의식해서 인지 금리는 손댈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경제적 추세가 가속되면 정부의 경직성도 풀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최철주·이장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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