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농민 이끌고 간척지를 옥토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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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추수를 끝낸 넓은 들녘은 고요하기만 하다. 그 고요 속엔 풍요와 평화가 함께 깃들여 있었다. 개척 6년 만에 옥토로 변한 남양만 9백60여만평은 이제 풍요의 젖줄이 되어 올해도 대풍을 이루었다.
남양만은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이화리 1111번지 일대를 가리킨다. 서울서 가자면 능산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수원을 지나 조암을 거쳐 이화리에 닿는다. 비포장도로도 있어 버스로 3시간 남짓 걸린다.
이화리 버스종점에 닿으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활빈교회의 십자가다.
활빈교회란 남양만을 옥토로 바꾼 원동력이 된 모체였으며 김진홍 목사(42)는 바로 그 교회의 주인공이다.
『신앙의 기적 없이는 이런 일을 성취할 수 없었지요. 주님의 은혜는 참으로 감동적이라 그것을 쉽게 말로나 글로선 표현할 수 없어요.』김목사의 말이다.
활빈교회-. 도시의 빈민을 오늘의 중농으로 바꾼 중심체. 활빈교회는 『가난을 신앙의 힘으로 이기자』는 뜻을 담고 있는데 활빈이란 글자는 「홍길동전」에 나오는「활빈당」의 바로 그 활빈이다.
바다를 막아 땅을 만든 남양만에 뿌리를 내린 정착민은 현재 1천3백여가구 6천5백여명이다. 이 가운데 김목사를 따라서 서울서 온 이주민이 4백63가구, 나머지는 화전민·전국 각지의 이주민 또 일부는 현지민 등이다.
이들은 6년 동안 피땀을 흘려 이제는 가난을 쫓고 6천평씩의 지주가 됐으며 농사외 부업으로 든든한 중농이 됐다.
교회 구내 15평 크기의 집에 가족과 함께 사는 김목사도 3천평의 논밭에 농사를 짓고 돼지도 20여마리 먹이고 있다.
이 곳에 정착하기까지 김목사의 고초와 수난은 참으로 감동적이다. 김목사 말처럼 신앙의 힘이 아니고선 이룩할 수 없는 기적이었다. 이런 감동적인 김목사의 얘기는 일본서 먼저 단행본으로 소개됐고 뒤늦게 지난 8월 우리나라에서도 『새벽을 깨우리로다』(홍성사간)란 제목으로 김목사의 저서가 발행됐다. 또 금년말엔 미국에서도 번역, 발간될 예정이다.
김목사는 1941년 6월 18일 경북 청송 출생. 66년 대구 계명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기독교 집안에 태어났지만 한때는 기독교에 회의를 품고 잠시 불교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머니의 간곡한 권유로 다시 신학교에 입학하면서 목사가 됐다.
그래서 71년 10월 서울 청계천 하류 송정동 74번지 속칭「뚝방촌」에 활빈교회를 세웠다.
당시 송정동 74번지 안의 1천6백여가구 주민들은 거의가 농촌서 무작정 상경한 이농민들이었다.
극심한 빈곤과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남자들은 일자리를 얻지 못했고 부인과 아이들은 품팔이나 공장에 나가 얼마씩 벌어서 끼니를 이어오고 있었다.
처음의 교회는 14만5천원에 방이 셋 있는 판잣집을 구입, 1개는 살림집으로 쓰고 방 2개는 개조해 교회로 썼다.
이렇게 활빈교회는 시작됐는데 김목사가 버림받고 가난한 동네로 파고든 것은 그의 신념때문이었다.
『비천한 사람을 구원하고 그들에게 사랑을 나누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 참종의 노릇이라 생각해서 그들을 찾았지요.』 김목사는 말하고 있다.
청계천에서 남양만으로 떠날 때까지의 5년 동안의 생활은 고통과 시련의 시기였다. 교회를 우습게 알고 폭력배들의 난동장소가 되는가 하면 김목사 스스로도 생계가 어려워 3년 동안 넝마주이로 교회를 이끌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주민들은 순한 양처럼 김목사를 따르게 됐고 이 동네는 차츰 질서와 재생의 의욕이 되살아나게 됐다.
76년 겨울, 서울 시청이 내린 청계천 판자촌 전면철거로 김목사는 남양만으로 떠났다. 그때 김목사를 따라 나선 그 곳 주민들이 4백63가구였다.
『바다를 막은 곳이라 소금기 때문에 농사가 제대로 되질 않았어요. 그러나 좌절과 절망이 있을 때마다 우리들은 주님에게 매달렸고 주님은 결국 우리를 구원하셨지요.』 김목사는 목사라고 해서 가만히 교회만 지키고 있지는 않았다. 청계천 때와 마찬가지로 팔을 걷어 붙이고 주민들 사이에 뛰어들어 땅을 일구고 농사를 지었다. 땀과 주님의 은혜로 남양만은 안정됐고 교회도 7개로 늘어났다. 교회는 예배보는 곳만이 아니라 그 지역의 농사와 크고 작은 일들을 의논하는 마을회관 구실도 하고 있다.
김목사는 장로회 신학대학원(박사과정) 강의를 듣느라고 1주일이면 하루는 서울에 온다.『시골생활에 젖어 이제 서울에 오면 이질감을 느껴요. 서울에 닿자마자 곧 시골생각이 나거든요.』 김목사가 요즘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이 도시교회의 비대화다. 『목사와 교회란 하느님의 종이고 백성의 종이 아닙니까. 그 종이 백성들의 위에 군림하면 교회 자체의 존재이유가 없어지지요. 아직도 우리 주위엔 헐벗고 불쌍한 백성이 많습니다. 교회의 부가 이들을 위해 쓰여져야지 교회 자체를 위해 쓰이면 이것은 기독교의 참뜻과 교회의 진리가 말살되는거지요.』 김목사의 무거운 한마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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