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9) 제79화 제79화 육사졸업생들(2) 장창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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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우리는 장차 수립될 우리 조국과 정부에 충성을 다한다.』
따뜻한 봄날씨, 태릉의 한 벽돌건물안에서 신생 조국의 군장교가 되려는 건아들의 「애국선서」가 울려퍼졌다. 46년5월l일에 있은 남조선경비사관학교 개교식및 동교 제1기생입학식이었다.
명색이 사관학교 개교식이건만 세상에 알리지도 않았고 알려지지도 않은 초라한 대내행사로 끝냈다.
참석자래야 육사초대교장으로 부임한 이형근참령(소령)과 미고문관, 그리고부교장·교수부장·생도대장을 정하고 있는 나와 88명의 입교생이 전부였다.
정부가 수립되기 전이어서 지금의 국방부격인 통위부의 부장으로 유동선장군이 있었고 육군본부격인 경비대사령부 사령관으로 원용덕 참령이었었지만 그분들조차 이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어쨌든 이날은 1909년 한국무관학교가 일제에 의해 폐쇄된이후 37년만에 우리나라는 정식 사관양성소를 갖게된 날이다.
당시는 우리 군복이 없어서 일본군 창고에서 압수한 일본식 군복에 각반을 차고 위에다 미군이 공급해준 아이젠하워 재키트를 걸치고 있었다.
그후 6·25가 나기까지 4년간 10기까지 뽑았고 9기까지는 단기 40일, 장기6개월간의 속성교육을 실시했다. 당시는 장교의 양성이 촌각을 다툴만큼 시급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는 이미 46년2월에 「평양학원」이라는 군 간부 양성소가 생겨 일거에 8백명을 입소시켜 교육을 시작하는등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고 우리도 국방경비대를 한창 창설해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선은 군사경력이 있는 청년들을 입학시켰고 그 때문에 단기훈련으로도 장교로 임관시킬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도 장교가 모자라 5기부터는 민간인 지원자들을 받아들여 먼저 3개월간의 기초훈련을 시킨 다음 유경력 지원자들과 합류시켜 다시 3개월간 간부교육을 시켰다.
7기와 8기엔 「특별반」이라는것이 있었다. 「특별반」이란 해외에서 군사경력을 쌓았지만 귀국이 지연됐거나 입대결심이 늦어진 사람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일종의 문호개방정책이었다.
이특기제도의 채택으로 국내에 있던 능력있는 군사요원을 뒤늦게나마 거의 흡수할수 있었고 그때문에 필요인원도 조기에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내혁국회의장이나 유병현주미대사를 비롯하여 유양수·이주일·장경순·조문환씨등이「칠특」이고 독립기념관건립책임을 맡은 안춘생장군을 비롯하여 유원식·이백일·이석제·이욱근씨등이 「팔특」으로 들어와 장성이 된 분들이다.
그밖에 「생도1기」니 「생도2기」니 하는 말이 있다. 민간에서는 이를 4년제 육사1기(11기) 또는 2기(12기)로 통용되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이다.
정부가 수립된후 군 지도자들은 좀 더 충실한 교육을 받은 장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0기부터는 2년제 과정의 생도를 뽑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생도l기」였던 것이다.
6·25가 났을때 생도1기는 2학년으로서 졸업을 20일 남겨놓고 있었고, 생도2기는 갓 입학해 있었다.
이들은 북괴의 남침을 맞아 포천등지에서 8차례의 전투를 치르는동안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아무리 전국이 불리하다해도 사관생도를 교육중에 출전시켜야 했느냐 하는것은 그후 두고 두고 반성과 교훈의 자료가 되어왔다.
그해 7월10일 생도1기는 대전에서 10기로 임관됐고 생도2기는 해산되었다가 그해 8월15일 부산 동래에서「종합1기」 또는 「2기」로 임관됐다. 황영시 육군참모총장 같은분이 바로 그 비운의 생도1기 출신이다.
육사는 6·25로 휴교했다가 전쟁이 한창 치열하던 51년10월30일 피난지 진해에서 4년제 육사로 다시 개교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역사의 파도속에서 성장해온 육사는 어쩌면 구한말이후의 우리 조국의 험난한 운명과 맥을 통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오늘의 육사, 오늘의 국군을 알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그 뿌리로 거슬러 올라가 살펴볼 필요가 있을것 같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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