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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하는 국가 표준] 1. 국가표준이 겉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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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86년 우주왕복선 '챌린저 호' 폭발 사고. 99년 화성 탐사선 '폴라랜드'의 궤도 진입 실패.

미 항공우주국(NASA)의 역사에 오점을 남긴 두 사건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정답은 단위 착오에서 생긴 사고라는 것이다. 당시까지 NASA는 미국에서만 쓰는 인치와 파운드 단위를 국제표준단위(SI)와 섞어 썼다. 그 결과 '센티미터'와 '인치'가 혼동된 부품이 챌린저 호에 들어갔고, '파운드'로 잘못 계산된 로켓이 화성 탐사선에 장착됐다. 이것이 바다 건너 남의 나라 일만일까?

환경부의 정부규격은 수질 오염을 잴 때 'ppm(parts per million)'이란 단위를 쓴다. 1t의 물 안에 중금속 1g이 들어 있으면 1ppm이다. 그러나 수질 오염을 재는 국제표준단위(SI)는 'mg/L(또는 ㎏)'이다. 압력 단위는 한 술 더 뜬다. 국제표준단위는 '파스칼(Pa)'이지만 정부규격에서는 '㎏f/㎡'를 쓴다. 심지어 'f' 자를 뺀 엉터리 단위도 수두룩하다.

표준협회 이경한 표준계획팀장은 "잘못된 단위를 정부 규격으로 쓰면 국제적인 망신은 제쳐두더라도 단위 환산의 오류로 대형 사고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각 부처는 "사소한 문제 때문에 정부규격을 바꾸면 민간 부담이 늘어난다"며 국가표준을 외면하고 있다.

◆ 권위 안 서는 국가표준=방독면의 KS규격은 국제표준에 맞춰져 있다. 그러나 소방방재청은 "KS규격이 너무 복잡하다"며 자체 규격을 그냥 쓰고 있다. 문화관광부는 놀이시설 안전성 검사 기준으로 KS 외에 '미국 ASTM, 일본의 JIS, 독일의 DIN 등의 기준을 참조해 구한다'고 명시해 놓았다. 다른 나라 국가표준을 정부규격의 기준으로 삼은 것은 KS에 대한 각 부처의 인식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국내 전철.지하철 운영시스템은 표준정책의 대표적 실패 사례로 꼽힌다. 서울 지하철 4호선이 남태령이나 선바위 역에 이르면 실내 전원이 모두 꺼졌다가 천장 전등 몇 개만 다시 켜진다. 몇 초 동안 전동차는 남태령~선바위 구간 66m를 달리던 관성에만 의존해 무동력으로 운행한다. 이 구간에선 또 오이도~남태령까지 왼쪽 터널을 달려온 전동차와 선바위~당고개를 오른쪽 터널로 달려온 전동차가 X자로 교차하며 터널을 맞바꾼다.

이런 일이 매일 되풀이되고 있는 이유는 수도권 전동차 운영이 철도청과 지하철공사로 이원화돼 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건설된 국내 철도는 일본의 도로와 마찬가지로 좌측으로 통행한다. 그러나 지하철은 우측 통행이다. 또 철도청은 교류 2만5000V를 쓰는 반면 지하철공사는 직류 1500V를 사용한다.

이 때문에 지하철 4호선 전동차는 남태령~선바위 구간에서 터널을 바꿔 타야 하고, 동력원을 교류에서 직류로 바꾸기 위해 전원을 잠시 끌 수밖에 없다. 서울 지하철 1호선 서울역~남영역 구간도 이와 똑같은 '사(死)구간'이다.

사구간을 운행하는 전동차는 교류.직류 겸용이어야 해 대당 1억5000만원이 더 비싸다. 더욱이 철도청과 지하철공사는 그동안 266대의 전동차를 구매하면서 제조사별로 서로 다른 규격과 부품을 쓴 전동차를 그대로 들여왔다.

◆ 국가표준 통합 서둘러야=2000년 마련된 국가표준 기본계획에 따라 산업자원부 산하 기술표준원이 1만6094종에 이르는 정부규격을 KS로 통일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정부규격 통일화율은 지난해 말 현재 75.2%에 머물고 있다.

기술표준원 한장섭 기술표준기획부장은 "원칙적으로 KS는 강제가 아닌 임의 규격이다 보니 각 부처가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정부규격을 KS, 나아가 국제표준과 일치시키는 것은 표준정책의 첫 걸음이다. 임의 규격으로 사용하던 국가표준을 강제 규격으로 통합하는 게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다. 일본도 최근 KS의 모델이 된 JIS 규격을 'New-JIS'로 바꾸고 강제 규격화를 추진하고 있다.

◆특별취재팀 = 정경민.김종윤.허귀식.김원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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