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적자에 눌린 수매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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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이맘때면 연례행사로 치러야하는 추곡수매문제-. 7·3% 가격인상에 7백만섬을 사들이는 것으로 결말이 났다.
요식행위처럼 되어버린 적당한(?) 실랑이 과정을 거쳤으나 여느때와 달리 수매가·수매량 모두가 당초부터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던 점이었다.
「한자리 숫자」라는 경제운용의 대원칙뿐만 아니라 우선 재원조달면에서도 누적되어온 양곡적자로 인해 더 이상 어찌해 볼 수 없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추어진 여건속의 최대공약수」라는 정부측의 강변도 일단 수긍할만하다.
최근의 안정된 일반물가추세에 비하면 오히려 7·3% 수매가격 인상이 매우 후한 편이라는 주장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이정도가 결코 농민들이 만족하는 수준일 수 없다는 점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한다. 추곡수매가 결정을 물가라는 잣대로 재는데서부터 상당한 오해가 비롯된다. 올해 예상 물가상승률이 기껏해야 5% (도매) 밖에 안되는데 무슨 불만이냐는 식의 발상이 바로 그런 것이다.
추곡수매는 1년농사의 결산이요 농민들의 결정적인 소득원이기 때문이다. 물가보다는 차라리 임금상승쪽에 관한 지표에 비교하는 것이 문제를 파악하는 보다 적절한 시각일 것이다.
어쨌든 한자리숫자 고수론이 워낙 팽배해있는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유독 수매가라고 해서 10% 이상을 고집할 수도 없게 되어있다.
문제는 수매량쪽이 더 심각하다. 수매에 응하는 추곡은 거의 모두가 통일계의 신품종 벼들인데 전체 수매량을 늘렸음에도 불구하고 통일벼생산량에 대한 수매비율은 오히려 낮아졌기 때문이다.
작년의 경우 신품종 수확량 9백70만섬 중에서 6백35만섬을 사들여 수매율이 64% 수준이었던데 반해 올해는 7백만섬을 수매하면서도 신품종이 1천3백만섬 정도로 증산될 전망이므로 결국 실질적인 수매율은 54% 수준에 그치는 셈이다.
이래서 농민들이 절실하게 원하는 바도 수매가격인상보다 수매량을 늘려달라는 것이었다. 신품종이 많이 생산되었는데 정부에서 덜 사줄경우 시중으로 풀려나가 일반쌀값을 떨어뜨릴 것이 뻔한 일이다.
9월말 현재 1천만섬의 쌀이 재고로 남아 있는데다 외미 도입의 끝마무리인 1백50만섬 가량의 추가도입이 여기에 더 보태질 것이고 보면 적정선의 쌀값 지지는 매우 어렵게 되어있다.
그러나 딱한 것은 정부쪽도 마찬가지다. 정작 농민이 원하는 것은 수매량을 늘려주는 것인 반면 바로 그 점이 정부로서는 가장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7백만섬을 수매하는데 필요한 돈이 자그마치 7천4백억원, 1백만섬 늘릴 때마다 1천억원씩 불어나게 되어 수매가 몇 % 더 올리는 것하고는 단위가 다르다.
수매가를 1% 더 울리는데 70억원정도 더 든다.
농민보호에 앞장을 서야 할 농수산부 자신도 작년도 수준인 6백만섬 수매가 최고 한도라고 정해놓고 있었다. 한마디로 돈을 더 찍어내지 않고서는 달리 재원조달의 방도가 없었다.
작년말 현재의 한은차입이 무려 1조l천9백21억원 당시만 해도 양곡문제로 돈 찍어 달라는 이야기는 더 이상 안할테니 그 동안의 빌은 돈은 없었던 일로 하자는 타협이 이루어 졌었다.
그러나 금년들어 다시 2천억원으로 불어났고 이번 추곡수매로 또다시 l천억원 이상이 덧붙여지게 됐다.
결국 정부의 양곡적자를 해소하는 길은 수매가가 오르는 만큼 방출가 역시 올려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형편이니 문제다.
외미의 과다도입이 두고두고 빚어내고 있는 후유증의 결과인 것이다. 남아도는 쌀에 정부방출미가 잘 팔릴리 없고 따라서 올리겠다던 방출미 가격은 금년 한햇동안 꺼꾸로 내려야했다.
한마디로 야당은 물론 여당측의 요구에도 미진한 내용을 결정하면서도 이처럼 심각한 내부적인 딜레마에 빠져있는 것이다. 그 동안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않고 이월만 시켜온 결과 정부의 양곡운용(양곡기금) 문제는 폭발직전의 위기에 있는 것이다. <이장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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