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북괴 직접 교역」 관련|홍콩 지 보도 내용 전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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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미국과 북한은 워싱턴 당국의 공식적인 대 평양 상거래 중단조치에도 불구하고 비록 미미한 수준이기는 하나 최소한 79년 이후부터 직접교역을 해왔다.
파이스턴 이커노믹 리뷰 지가 입수한 미 상무성 자료에 따르면 79∼81년 사이의 미-북한 상호교역 액수는 31만 달러로 국제 무역 면에서는 보잘것없는 숫자이지만 외교적으로는 단순한 거래 액 이상의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미국정부는 평양과 외교관계가 없을 뿐 아니라 수년 동안 북한과의 모든 직접무역을 금지해왔다. 이에 따라 북한은 베트남· 캄보디아· 쿠바 등과 함께 미국의 금수 대 상국 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서울이나 동경에 있는 미국 관리들은 미-북한 직접 무역이 어떻게, 그리고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 즉각적인 해명을 하지 않고 있다. 서울에 근무하는 한 미 교역담당관리는 『그것만으로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 미국 외교관은 과거에 「한, 두 차례」 그 같은 경우가 있었으며 당시 미국은 예외적으로 수출허가를 내줘 의약장비나 병원보급품 등이 평양으로 수송됐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리뷰 지가 파악한 자료에는 꽤 다양한 상품들이 거래된 것으로 나타났다.
워싱턴당국의 대북한무역중지조치는 이 지역에서 미국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인 한국을 의식한데서 비롯된 면도 없지 않다. 미국은 적어도 북한의 주요 맹방 들인 소련과 중공이 서울과의 상호관계수립에 공식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한 북한과는 무역을 하지 않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겠다고 끊임없이 주장해 왔다. 지난해 한국과 중공이 주로 홍콩을 통해 수 백만 달러에 달하는 상품을 포함한 교역이 있었다는 신문보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는 북한과의 무역중지 조치를 철폐하지 않았다.
미-북한의 직접무역에 대해 동경의 한 한국 정부관리는 『우리가 아는 한 상호교역은 있을 수 없다. 북한이 미국으로부터 무엇인가 사들여 왔을 지는 몰라도 그들이 미국에 내다 팔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고 말했다.
또 다른 한국 소식통은 미-북한 무역자료는 통계의 잘못이라고 지적한 뒤 한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북한과의 무역거래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평양 측의 공식적인 반응은 얻어낼 수 없으나 동경에 있는 북한 소식통들은 미국 상품들이 평양에 꾸준히 나돌고 있다고 밝혔다.
일본에 살고 있는 한 조총련계 주민은 북한에서 미국제 자동차· 타이프라이터· 만년필· 악기, 그 밖의 몇몇 기계류 등을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중 일부 또는 대부분은 제3세계를 통해 수입된 것이다.
(김일성이 그의 이름을 붙인 대학에 맨 먼저 기증한 책은 미국에서 출판된 웹스터 사전이라고 한다.)
미 상무성 자료에 따르면 79년 미국의 대북한 수출액은 1만2천 달러 어치의 화학제품이었으며 특히 공업용 유기화학제품이 주류를 이루었다. 같은 해 미국은 북한으로부터 11만4천 달러 어치의 상품을 사들였는데 이중 4만8천 달러는 금속과 금속제품, 6만5천 달러는 잡화였다. 잡화 가운데는 전기용품이 2천 달러, 신발· 장갑· 모자· 가방이 1만3천 달러, 빗· 술· 우산이 4천 달러, 그 밖의 물품이 4만6천 달러였다.
그 밖의 것들은 단가가 1천 달러 미만의 것들로 건전지· 운동구· 장난감· 자전거, 고무와 플래스틱제품, 예술품과 골동품 등이다. 상무성 자료에는 80년과 81년의 미국의 대북한수출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북한은 80년에 13만6천 달러, 81년에는 4만7천 달러를 미국에 각각 수출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80년도 수출은 섬유· 섬유제품이 9만8천 달러, 잡화 3만6천 달러, 기계류 l천 달러 미만 등이다.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선 81년에는 두 나라 사이의 상호무역이 최근 3년 사이 최저수준으로 떨어져 북한은 겨우 1만2천 달러 어치의 섬유류와 3만3천 달리 어치의 금속과 기계 제품을 수출했으며 금속과 기계제품은 라디오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 1천7백28 달러 어치의 디지틀 시계도 있었다.
상무성 자료에는 이 무역이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어떤 회사, 무역대리점들이 관계돼 있는지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미국에는 수 십만 명의 한국계 미국인들이 있으며 이들이 상품거래에 한 역할을 맡았을 수도 있다.
대부분의 거래는 현금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북한은 7O년대 중반 일본과 서구,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교역에서 18억 달러의 부채를 진 뒤로는 현금에 쪼들려 왔다.
평양 측은 3백억 엔(1억1천1백80만 달러)의 이자와 원금을 일본회사와 은행들에 갚기는 했지만 아직 7백억 엔의 빚이 남았고 다른 채권자들에 대한 부채도 그대로 있다. 이 같은 거래관계의 오점 때문에 과거 2, 3년간의 북한과의 무역은 항상 현금 베이스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동경의 한 무역관계 분석가는 미국이 북한으로부터 사들여 온 여러 가지 상품들은 미국의 구미에 맞는 종류· 가격· 품질 등을 시험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미-북한의 거래가 본격적인 것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제3국들을 통하지 않고 직접교역을 한 것이었다』라고 지적했다.
무역거래수준이 「지미· 카터」 대통령 집권 당시 북한이 상대적인 개방정책을 발작적으로 표명하던 때 증가됐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 하다.
79년4, 5월 평양은 국제탁구대회를 개최, 2천 여 명의 외국인들을 끌어들였다.
80년에는 미국의 선량으로서는 수년만에 처음으로 「스티븐· 솔라즈」 하원의원이 평양을 방문했다. 그의 방문결과는 아무 것도 없었고 미국은 계속해서 미국을 방문하려는 북한 인들에 대한 비자 발급을 거부했다.
한 때 반짝하던 미-북한무역은 강력한 반공을 내세운 「레이건」 행정부의 등장이래 분명히 바짝 말라붙었다. 미 상무성의 통계에는 미국이 이 의문의 기간 동안 북한과의 교역에서 29만8천 달러의 무역적자를 본 것으로 나타났다. 【동경= 「마이크· 다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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