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국가정보기관 무장해제는 안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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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국가정보기관의 불법도청 문제로 야기된 우리 사회의 혼돈상황이 갈수록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이번 도청파문으로 야기된 쟁점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그동안 저질러진 국가기관에 의한 범죄행위에 대한 처리 문제다. 국가 스스로 범죄행위를 자행하면서 국민을 향하여 준법을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국민 앞에 엄숙히 잘못을 빌고 관련자들에 대해서는 엄중한 처벌을 받도록 해야만 한다.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은 국가의 항구성, 정부의 영속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어느 정권에서 이루어졌느냐를 따지기에 앞서 우선 현 정부가 적극 나서서 국민에게 석고대죄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현 정부는 과거 정부의 공적뿐만 아니라 그 과오까지도 포괄적으로 승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직속기관인 국가정보기관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행위이고 보면 현직 대통령이 자신의 일처럼 직접 나서서 진심으로 참회하고 용서를 비는 도량을 보여야 한다.

둘째 쟁점은 불법적으로 수집된 도청 테이프의 처리다. 다양한 견해가 있겠으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도청 테이프를 정략적으로 활용하려는 발상은 안 된다는 점이다. 불법도청이 공작정치의 산물인 것과 마찬가지로 도청 테이프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활용하려는 의도 역시 공작정치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도청 테이프는 불법적 도청행위를 입증하는 증거물로만 사용할 뿐 다른 용도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 형사법은 불법으로 수집한 증거를 단서로 수사를 해서도 안 되고, 이를 유죄의 증거로 삼아서도 안 된다는 확고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불법으로 수집된 테이프에 기초한 검찰의 수사는 몰래 훔쳐온 불법의 주춧돌 위에 지은 건물과 다름없다.

또한 우리 헌법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헌법의 기본원리로 천명하고 있고, 개인의 행복추구권 및 사생활의 비밀보호를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다. 그 때문에 도청 피해자의 동의 없는 일방적인 도청내용의 공개는 도청 피해자의 헌법적 기본권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하는 행위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려울 때일수록 원칙에 입각해서 문제를 풀어 가야 할 것이다.

셋째 쟁점은 원죄적 책임이 있는 국가정보기관에 대한 처리 문제다. 우선 문제된 불법도청이 정상적인 지휘.보고체계를 거친 공식 임무수행의 일환이었는지를 따져봐야 할 것이다. 정보기관 차원의 조직적인 임무수행이었다면 도청행위 전반에 대해 형사적 책임을 물어야 하고, 비선조직 같은 일부 세력에 의한 범죄행위라면 이를 철저히 감시하고 관리하지 못한 정치적.도덕적인 지휘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번 파문으로 마치 국가정보기관이 불법적인 도청만을 일삼는 범죄집단으로 계속 매도되는 것은 국가이익이란 측면에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국가정보기관의 업무는 대개가 국가의 안전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 극한상황에서 수행되는 경우가 많고, 공개될 경우 외교적 마찰을 야기하거나 국가적 체면을 손상시킬 수도 있는 일들이 많아 철저하게 '밀행성(密行性)'을 원칙으로 한다. 그래서 국가정보기관의 요원들은 숙명적으로 자신의 임무에 대해서는 그 비밀을 무덤까지 안고 가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는 '자랑해서도(NO Pride), 설명해서도(NO Explain), 변명하거나 불평해서도(NO Complain)' 안 되는 것이다.

오늘날 냉엄한 국제사회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자국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서라면 도.감청을 하지 않는 외국의 정보기관이 없다는 사실 또한 직시해야 한다. 이번 파문의 결과가 국론분열 및 정보기관의 무장해제로 이어진다면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태우는 우(愚)를 범하였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박세규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