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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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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문명에 대한 신랄한 태도
일상을 무게감 있게 표현

고형렬 시인은 소위 '창비시선'의 다른 표현이었다. 창작과비평사 시집 편찬에 관여한 1985년부터 20년 동안 200권 넘게 출간했다. 이 세월 동안 창비의 시 세계는 시인 고형렬의 그것이었다. 그 일을 올초 그만뒀다.

"벌써 쉰살이 넘었거든요. 내가 낡아가는 건 아닌가, 자신에 대해 너무 친숙해진 건 아닌가 고민한 끝에 내린 결단입니다. 이제는 자유롭습니다."

창비 경향의 시가 대체로 묵직한 것처럼 그의 작품도 무게감이 있다. 쉬이 읽히는 편도 아니다. 하나 읽을수록 느낌이 다르다. 거대 사상을 말하는 듯 싶지만 시는 의외로 일상의 경험에서 출발한다. 심사위원도 비슷한 평이다. 김진수 위원은 "사물들의 세미한 움직임을 묘사하면서도 자유로움에 대한 욕망과 운명의 표정을 놓치지 않고 있다"며 "서사적 골격을 가지면서도 서정적 집중을 이루어내는 성공적인 시편이 많이 눈에 띈다"고 설명했다.

앞서 인용한 시 '음악을 죽인 거리'로 돌아가자. 처음엔 느낌이 섬뜩하다. 그러나 이내 문명에 대한 신랄한 태도가 읽힌다. 시인의 해설을 옮긴다.

'아침 출근길 도심 횡단보도. 이어폰(레시버)으로 음악을 듣고 있던 여자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여자는 심하게 다쳤고, 그녀의 음악 상자는 박살났다. 아마도 그녀 주위엔 행인이 많을 것이다. 아침 출근길 경악스러운 장면을 그들은 둘러서서 지켜볼 것이다. 순간 모든 것이 정지한 듯 조용할 것이고, 그녀가 듣던 음악도 멈출 것이다. 그때 음악은 스스로 죽은 게 아니다. 살해된 것이다.'

보름 전 시인은 몽골에 있었다. 지난해엔 러시아 사할린에도 갔다왔다. 북태평양 베링해에서 연어가 찾아오는 10월이면 강원도 삼척의 오십천도 찾을 생각이다. 최근 그의 행적은 '동아시아적인 것'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했다. 그러나 동아시아적인 것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을 삼갔다. "요즘 주목하는 화두"라고만 했다. 시인 고형렬의 변화를 조심스레 점쳐본다.

손민호 기자

시 - 고형렬 '음악을 죽인 거리'

오래된 순간이었다,

음악 상자가 길바닥에 떨어진 것은

치아교정이 부서지고 옷이 찢어졌다 하체가 해체됐다

보청기 모양의 아기, 고무 타이어에 으깨지고

모든 기능은 멈추었다

그녀의 귓구멍만한 레시버, 생의 거짓이 도로에 누웠다

바리케이트 너머 사이렌을 울어도

환한 열 손가락은 하늘을 향해 모두 폈다 마디에 그녀의

힘이 빠져나가는 도심

흩어진 머릿결 속에서 빨간 피가 천천히 흘러나왔고,

한 마리, 피의 줄기 같은 우스꽝스럼

음악이 죽은 거리는 갑자기 어느 생의 아침이 딱 멈춘

텅빈, 비현실 도로

나는 매일 그녀가 죽은 그 자리를 피해 건넌다

마치 펭귄이 남극에서 달로 건너듯

왼쪽 뺨과 오른쪽 귀에 음악이 파닥이는 오전 8시

한 여자가 아스팔트에 작은 코를 박고

쓰러져, 울고 있다.

(불교문예 2005년 봄호 발표)

◆ 고형렬 약력

▶1954년 강원 속초 출생 ▶7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대청봉 수박밭'(85년) '성에꽃 눈부처'(98년) '김포 운호가든 집에서'(2001년) 등 다수 ▶지훈상(2003년) ▶미당문학상 후보작 '음악을 죽인 거리'외 15편

산악원정대 이야기 속에
왕오천축국전 메시지가 …

김연수씨는 지금 독일에 있다. 앞으로 석달간 독일대사관 초청으로 밤베르크라는 고도에 머물 예정이다. e-메일로 "거기서 뭐하냐" 물었더니 "하루 종일 북적이는 관광객 보면서 소일한다"고 속 편한 답을 보냈다.

70년대산 소설가 김연수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인정받는 작가다. 그가 부단히 추구해온 메타텍스트(Metatext)적인 글쓰기는 이제 '김연수적'이라는 평까지 낳고 있다. 후보작에서도 그의 특장은 여실히 드러난다. 겉으로는 낭가파르바트 원정대의 이야기이지만 속으로는 '왕오천축국전'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작가에게 물었다. 본래 무엇을 쓰고 싶었냐고.

"오래 전부터 혜초의 여행기에 끌렸다. 특히 이런 문장이다. '풍속이 지극히 고약해서 혼인을 막 뒤섞여서 하는 바, 어머니와 자매를 아내로 삼기까지 한다.'삶의 극단에까지 가본 사람에 대한 비유처럼 들렸다. 원래 생각한 소설에선 '왕오천축국전'에 주석을 단 실제 인물을 염두에 뒀다. 하지만 막상 글을 써보니 낭가파르바트를 최초로 등정한 헤르만 불에게 더 끌렸다. 그래서 '왕오천축국전'을 읽는 산악인이 등장한 것이다."

그의 소설은 심심풀이용이 아니다. 동서양의 숱한 고전이 수시로 인용된다. 인문학적 소양 없이는 독해가 어려운 작품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인용되는 고전이 단지 소재로만 쓰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 소재를 토대로, 때로는 소재의 해체를 통해 새로운 이야기를 끌어낸다. 메타텍스트적인 글쓰기라는 평은 이래서 붙었다. 그의 시도가 유독 돋보이는 건 "여러 겹의 이야기를 무리없이 한 편의 이야기 속에 용해시키는 놀라운 축조술"(김동식) 덕분이다.

히말라야 원정대의 일상이 워낙 생생해 "원정대를 따라가본 적 있냐"고 물었더니 "한번도 없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몇몇 등정기를 읽어봤을 따름"이란다. 공부 많이 한다고 소문난 작가에게도 "소설은 상상력의 소산"이었다.

손민호 기자

소설 - 김연수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 작품 소개

1988년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기원하고자 낭가파르바트 원정대가 구성된다. 그 원정대에 합류한 그. 원정에 나선 사연과 험난한 여정이 소설의 줄거리다. 전개되는 사건은 이게 전부지만 소설을 이해하기에는 턱없다. 원정을 떠나기 전부터 그가 줄곧 읽고 외우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또 다른 줄거리를 이루기 때문이다. 원정대와 관련한 사건이 씨줄이라면 '왕오천축국전'은 날줄이다. 씨줄과 날줄은 정치하게 교직한다. 김연수다운 작품이란 평이다.

(문학수첩 2005년 봄호 발표)

◆김연수 약력

▶1970년 경북 김천 출생 ▶94년 '작가세계'문학상 받으며 등단 ▶장편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94년) '꾿빠이 이상'(2001년) 등 다수, 소설집 '스무살'(2000년)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2002년) '나는 유령작가입니다'(2005년) ▶동서문학상(2001년), 동인문학상(2003년) ▶황순원문학상 후보작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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