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 어디까지 화해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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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60년대 중반 중공의 문화혁명세력은 자유지의 확대와 기업이윤제의 도입을 주장한 유소기 국가주석과 등소평 총서기를「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실권파」라고 공격했다. 유소기와 등소평을 실각시킨 문혁파의 공세는 소련의 사회주의체제에 대한 정면 비판이기도 하여 중-소 관계는 한층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배경을 상기한다면 모택동 사후 문혁파가 몰락하고 등소평이 중공의 실권자로 복귀한 지금 4반세기에 걸친 중-소 분쟁을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북경과 모스크바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같이 보인다.
더군다나 당12차 대회를 치른 중공은 이데올로기보다는 경제건설을 우선하는 실용주의노선을 정착시키고 있기 때문에 국경분쟁을 제의하고는 중-소 불화가 원인 무효 된 거나 다름 없게되었다.
「브레즈네프」는 지난 3월24일 타슈겐트에서 아무 전제 조건 없이 중-소 관계개선을 위한 협상을 시작하자고 제의했다. 중공 쪽에서는 호요방 총서기가 12전 대회에서 소련이 성의를 보인다면 중-소 관계는 정상화될 수 있다고 받았다.
이렇게 해서 지금 북경에서 두 나라 외무차관회담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중공과 소련은 69년3윌 국경지대우수리강의 진보도 (다만스키) 에서 무력충돌을 일으켜 두 나라 관계가 최악이라고 생각되던 때에도 그해 9월 북경에서 주은래 -「코시긴」회담이 이루어졌다. 이데올로기 문제는 잠시 접어두고 국경분쟁으로 인한 국가관계의 파국을 막자는 생각에서였다.
10월에는 모스크바에서 정식으로 화해의 길을 찾는 회담이 시작되었다. 그때는 이미 모택동이 죽은지 3년이 되고 등소평도 부주석으로 복권하여 실권을 잡고 있을 때였다.
중-소 회담이 79년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침공으로 중단되고 중공은 소련의 패권주의를 맹렬히 비난했지만 등소평이 권력의 자리에 있으면 언제나 중-소 화해는 시도된다는 사실은 분명해진다.
고위실무자급의 회담은 이제 시작된 데 불과하지만 81년4월에는 중-소 국경철도 연락수송위원회가 의정서에 조인하고, 6월에는 서년 상품교환지불협정이 체결되었다.
올 들어서는 두 나라 학자, 스포츠단체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지난 4월에는 82년도 무역지불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런 실질적인 조치들을 통해서 두 나라의 화해를 위한 대화는 궤도에 오른 것같이 보인다.
중-소 화해는 동서간의 세력균형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마련이다. 특히 아시아태평양지역, 그 중에서도 한반도의 균형에 엄청난 영향을 주게된다.
우리가 중-소 화해의 모색을 주시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소련은 폴란드, 아프가니스탄,「레이건」행정부의 도전, 어려운 경제사정 때문에 중공과의 화해를 서두르려고 한다. 중-소 국경 지대의 긴장완화는 군사비의 대폭 경감을 의미한다.
중공은 대만문제로 미국과 여전히 신경전을 벌이고 있어 대소화해제스처는「소련카드」로 대미압력수단이 된다.
그러나 양쪽의 이런 절실한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분쟁의 대상이 되고있는 1백50만 평방km의 영토 문제는 내다볼 수 있는 장래에 중-소가 웃으면서 악수할 수 있는 사태를 가로막고 있다.
두 나라의 민족적 불신은 오랜 역사적인 유산인 것이다.
이런 실질적인 어려옴이 있다고는 해도 서서히 나마 중-소는 화해의 궤도에 오르고, 그런 변화에 북괴는 재빨리 적응하는 자세를 취할 것이다. 중공과 소련이 적대관계를 해소한 뒤의 동북아시아, 한반도정세에 우리는 미리부터 대처할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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