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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한국영화계의 대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한국영화사의 산 증인이었던 복혜숙씨가 5일 하오5시30분 별세했다. 향년78세. 복여사는 4일하오 3시께 서울서 교동자택 마당을 거닐다 갑자기 심장마비증세를 일으켜 이화여대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회복하지 못한채 숨을 거둔 것이다. 복여사는 지난2일 KBSTV 인터뷰에 출연할 만큼 평소 건강이 좋았었다. 유족으론 외동딸 김진영씨와 사위 성낙응씨(이화여대의대학장), 그리고 손자손녀 1남2녀가 있다. 장례식은 본인의 유언에 따라 가족장으로 7일 상오10시 이화여대부속병원에서 거행되며 서울시립장재장에서 화장, 관음사에 안치된다. 연락처 (324)5430.
복혜숙여사-. .1920년대 양장을 한 모던걸로 한국영화계의 한시대를 주름잡았던 주인공이었다. 나이와는 관계없이 여전한 특유의 유머로 노년을 건강하게 보내던 복여사의 갑작스런 별세는 평소 그를 따르던 영화인들은 물론 많은 팬들을 놀라게했다.
재작년 정원의 라일락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져 다리를 삐어 불편했다는 것외에 요즘도 여전히 15년전 이방자여사에게서 익힌 칠보제작을 즐기면서 건강한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빈소엔 많은 영화인들이 줄을 이었으며 평소 모녀같이 지내온 황정순씨는 『그분은 한국영화계와 후배배우들의 정신적인 지주였다』고 애도했다.
복여사는 1904년4월24일(음력) 충남보령군대천면동대리에서 기독교 전도사업을 하던 복기업씨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복여사가 태어날 당시 부친은 옥고를 치르고 있었다. 동학군으로 쫓겨 숨어다니던 부친이 기독교를 믿고 기독교 전도사업을 하다가 동학군임이 탄로나 투옥됐던 것이다.
심한 고초를 겪은뒤 가까스로 풀려난 부친은 가산을 정리, 하와이 이민을 계획했으나 그것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복여사는 어렸을때 2년동안의 인천생활을기억하고 있다.
다시 논산으로 이사한 복여사는 그곳에서 영화소학교를 졸업, 12세때 서울에 올라와 이화여중에 입학하려 했으나 영어시험에 떨어졌다.
17세되던 1921년 복여사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택모리노」무용학윈에서 무용과 노래를 배웠다.
귀국한 복여사는 한때 강원도금화군의 금성국교에서 9개월동안 교편생활을 하기도했다.
복여사가 연극에 데뷔한것은 19세때. 극단 「신극좌」에서 변기종씨가 연출한 『오호천명』이란 연극이었는데 복여사는 막뒤에서 찬송가 5백5장 『날빛 보다 더 밝은곳』을 부른 것이었다.
그뒤 1926년 조선키네마에서 제작한 영화 『농중조』에서 나운규와 공연하면서 화려한 연기생활은 시작됐다.
그뒤 『아리랑』 『낙화류수』『세동무』 『우도의 밤』 등을 비롯해 81년 이장호감독의『낮은데로 임하소서』에 이르기까지 복여사가 출연한 영화·연극·TV극등은 모두 4백여편이나 된다.
복여사의 예기는 영화·연극에만 그치지않아 1927년 조선중앙방송국(JODK)이 개국할 때는 성우로도 활약했다.
복여사는 20년대 한때 서울인사동에 「비너스」란 다방을 경영, 당시 문화·연예활동의 총본산 구실을 했다. 동경유학을 한 인텔리, 연극·영화계인사, 서울의 명문집 자제들이 모여드는 사교장이 됐다.
그뿐아니라 「비너스」는 영화의 로케장, 연극의 리허설 장소로도 이용됐다.
2일 KBS-TV 『1백분쇼』의 인터뷰에서도 영화걱정을 했다.
『관객이 든다니 다행이긴 하지만, 자꾸 벗기는 영화만 하면 어떡하나. 영상과 낭만의향기가 깃든 영화를 해야지.』 그리고는 또 한차례 복여사 특유의 웃음을 터뜨렸지만 그러나 그의 웃음뒤엔 어딘가 서운하고 쓸쓸한 그늘이 있었다. <김준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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