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환으로 출발한 또순이 지국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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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열여섯 단발머리때 중앙일보 제주지사 사환으로 들어와 스물여덟살 아기엄마가 될 때까지 l2년동안 억척같은 노력끝에 고정독자 4천12부를 확보한 여성지국장이 있다. 「제주또순이」로 소문난 맹렬여성은 중앙일보 서제주지국장 김치선씨 (28·제주시삼도1동631의19)-.
중학교를 졸업했을때 고교진학을 포기해야 할만큼 김씨네 가정형편이 기울었다. 향학열에 불타는 16살 단발머리소녀는 제주상고 야간부에 무조건 시험부터 치러 합격을 한뒤 중앙일보 제주지사를 찾아 사환으로 써줄 것을 간청했다. 이때가 70년2월.
김양은 사환일이 끝나면 자취하는 주인집 중학생을 매일새벽 1시간씩 가르쳐 학비를 보탰다.
73년3월 형설의 공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주산과 부기2급의 국가검정자격까지 얻게 되었다.
대우가 훨씬좋은 다른직장이 기다리고 있었으나 김양은 3년간 자신을 돌보아주고 학업을 마치게 해준 중앙일보를 떠날수 없다고 생각했다. 정식으로 지사의 경리직을 맡게되었고 자신이 일하던 사환 자리에 여동생 해선양 (26·현재미국유학중)을 앉혔다.
가난한 농가의 자녀로 태어나 동생들을 떠맡은 김양은 알뜰히 저축, 여동생 3명을 모두 고등학교까지 졸업시켰고 막내 옥선양 (22)을 제주대학에 진학시켰다.
고향 선배인 김병근씨(32·한국전력 제주지사근무)와 79년 중매결혼한 김씨는 10년간 정든 중앙일보를 떠나려 했으나 남편 김씨와 부모들이 말렸다.
『제 인생에서 중앙일보가 사라져서는 안된다는거예요. 제 인생의 성장이 중앙일보의 성장이었고 언제나 함께 숨쉬는 거라고 남편이 가정에 묻히는걸 오히려 반대했읍니다.』
김씨는 용기를 얻어 제주지사가 동·서제주지국으로 분리될때 서제주지국을 맡아 독립했다. 어린소녀때 첫발을 디뎌 10년만에 대중앙지의 지국장이 된 것이다.
80년8월 지국장을 맡을 당시 취급부수 2천1백23부가 창간일을 맞아 4천12부로 확장되었다. 자신이 경리직을 맡아 인건비를 줄이고 끊임없는 독자가정방문·철저한 배달사고방지·예의바르고 성실한 배달소년교육등 「또순이」기질이 이루어 놓은 결과였다.
김지국장은 약혼시절 데이트시간조차 내지못해 남편김씨로부터 『당신은 나보다 중앙일보와 결혼하려는 모양』이라는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고 했다.
김씨가 지국장을 맡자 시어머니는 이웃동네의 신문확장에 나섰고 국민교교감인 시아버지는 토요일 하오마다 60여명 배달소년들에게 고학하는 보람」을 심어주는 정신훈화를 맡고 나섰다. 남편김씨는 직장교육부에서 닦은 실력으로 배달소년들을 모아놓고 예절교육과 신문확장대화요령을 가르치고 막내동생은 판촉원으로 뛰었다.
갑작스런 기상변화로 제주는 비행기 결항이 많은 곳. 결항으로 신문이 오지 않을 때면 일일이 배달소년들을 독자집으로 보내 배달 누락이유를 설명토록했다.
김씨의 하루일과는 새벽5시에 일어나 집안일을 챙기고 상오9시에 출근, 밤9시까지 12시간을 신문판매일에 파묻힌다.
12년동안 신문일을 보다보니 그자신 준기자가 되었다. 70년12월15일 남영호침몰사고때 본사및 현지주재기자들의 취재일손을 도와 한자의 오자나 탈자도 없이 90통화이상의 송고를 한것은 너무나 유명한 일화.
『가장 어려웠던시절 용기를 잃지않고 오늘을 맞이한 것은 매일매일이 새샘물이 솟는듯한 신문사란 직장분위기와 경쟁세계에서 지칠줄 모르고 뛰는 기자분들을 보아왔기때문이지요.』
전국제1의 여성지국장이 되겠다는 김씨는 오늘도 독자에게 보내는 문안편지를 정성스레 다듬고 있었다.

<제주=제정갑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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