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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체면에 먹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지난 9월1일「레이건」대통령이 새로운 중동평화안을 제시했을 때 「술츠」국무장관은 미국의 중동외교에 전에 없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낙관적인 전망을 했었다.
그러나 그런 낙관론은 한달이 채 못가 서 베이루트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 자행된 무자비한 학살사건으로 깨져버렸다.
이 학살은 무엇보다도 이스라엘과 아랍진영의 극렬한 적대관계에서 공정한 중재자역할을 표방하고 나온 미국의 신빙성을 크게 해쳤다.
「하비브」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병력의 베이루트철수를 협상하는 과정에서 PLO지도부가 가장 신경을 쓴 초점은 자기들이 철수한 후 뒤에 남은 팔레스타인 난민들에게 해가 가지 않는다는 미국측의 다짐이었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이스라엘군이 베이루트에 진주하지 않을 것이며 민간인을 보호한다는 다짐을 요구했고 「하비브」는 이점을 이스라엘로부터 확약받아 PLO측에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문에 15일 이스라엘군이 이 양해사항을 어기고 서 베이루트에 진주하고 곧이어 양민학살이 일어난 것은 미국이 이스라엘을 컨트롤할 의도가 없거나 능력이 없다는 의심을 온건 아람국가들이 품게 만들었다.
따라서 온건친미아랍국가들, 특히 이집트와 요르단의 협조아래서만 진전이 가능한 「레이건」의 새로운 평화안은 어렵게 된 것이다.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둔 듯 학살사건에 대한 미국측 반응은 상당히 강경했다.
이스라엘군의 철수와 새로운 국제평화군의 파견을 발표한 20일자「레이건」대통령의 TV회견은 비교적 온건한 어조로 진행됐으나 배경설명에 나선 고위 국무성관리의 어조는 상당히 강경한 것이었다.
그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자치권 획득 없이는 중동평화의 바탕을 마련할 수 없다고 거듭 강조하면서 이스라엘군의 베이루트철수를 미국은 강력히 요구한다고 말했다.
또 19일에 발표된「레이건」대통령의 성명서도 그 학살이 이스라엘군의 진주로 가능했다는 점을 강력하게 암시했었다.
학살사건직후 이스라엘군의 철수를 요구하고 평화군의 진주를 실행하려는 미국측의 조치도 이스라엘에 대한 응징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린 반응을 통해 미국은 학살사건이 불러일으킨 아랍과 전세계의 여론을 무마하고 원안대로의 중동평화안을 살리려 하고 있는듯 하다.
그러나 사후약방문격으로 국제평화군의 두번째 배치가 더 이상의 학살을 방지할 수 있다고 해도 미국과의 양해사항을 간단하게 어기고 자기들의 고집대로 행동한 이스라엘을 보면서 미국은 공평한 중재자인가 아니면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의 공모자인가라는 의문을 아랍지도자들은 제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문이 있는한 「레이건」의 평화안은 난관에 봉착하게 마련이다.
최근의 학살사건은 중동평화를 성취시키기 위해 이스라엘의 양보를 얻어내지 않으면 안되면서도 이스라엘자체의 안보에 위협으로 간주될, 예컨대 경제원조나 무기공급의 중단같은 유일한 압력수단을 행사할 수 없는 미국측 딜레머를 다시 증명했다.
미국의 언론들은 예외 없이 사실보도를 통해 베이루트의 학살사건에 이스라엘군이 적어도 묵시적으로는 관련돼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스라엘군이 직적 총질을 하지는 않았지만 학살이 사흘째 계속되는 동안 이스라엘군 탱크들은 외곽방어를 해주었고 기독교민병대가 학살도중 쉬러 나올때 물과 음식을 제공했다는 현지 특파원들의 기사를 크게 보도했다.
뉴욕타임즈를 제외한 모든 주요신문들은 학살을 개탄하는 사설을 실었다. 볼티모 선지는 이 사건이 「인류에 대한 범죄」라고 비난했고 워싱턴포스트지는 이스라엘도 일부의 책임을 져야한다고 주장했다.
20일 아침 워싱턴의 라디오방송 청취자 대화시간에는 레바논학살사건에 분개한 청취자들의 전화가 쇄도했는데 한 청취자는 『무엇때문에 미국은 학살을 자행하는 이스라엘에 원조를 해주는가』고 흥분했다.
조지타운대에서 정치학을 강의하는 「허드슨」교수는 이스라엘이 의도적으로 기독교 민병대를 투입시켜 학살을 방임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면서 그 목적은 팔레스타인의 군사조직을 파괴한 후 그들의 생활터전을 없애고 팔레스타인 민간엘리트들을 제거하려는데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런 해석을 액면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중동문제의 역사는 마키아벨리즘과 그것이 낳은 불신으로 점철돼있기 때문에 그런 최악의 가설이 때로 진실보다도 많은 사람들을 움직이는 힘을 가졌다는 역설적 현상을 간과할 수 없다.【워싱턴=장두성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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