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5. 불꽃을 따라서 <21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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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두 번째로 얻어 든 집은 바로 우이동 계곡 물이 흘러 내려가는 개천 옆의 언덕에 지은 집이었다. 식구들이 사는 본채가 있었고 별채에 마루와 사랑과 뒷방이 있었는데 그 방을 우리 세 식구가 썼다. 다시 계곡이 내려다뵈는 곳에 일자 집을 내달아 짓고 방 세 칸을 들였는데 첫째 칸을 내 집필실로 빌렸다. 그 댁은 주인이 전쟁 때 북한 장교로 탱크를 몰고 귀순하여 국방군 중령으로 제대한 사람으로 목소리가 크고 기골이 장대한 남자였다. 그의 아내는 몸집도 가냘프고 어딘가 병약한 사람으로 보였고 남편에게 꼼짝도 못했다. 딸자식이 일곱이나 되었는데 그래 딸만 낳아서 그렇게 기가 죽어서 사는지 모를 일이었다. 주인 남자는 언제나 불호령이었다. 그는 거의 집안에서 왕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우이동에 놀러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식사와 주안상을 내어 생계를 꾸렸다. 본채의 너른 연회실과 안방이며 집 주위 곳곳 개천가나 소나무 아래에 돗자리를 깔고 상을 차렸다. 봄 가을의 주말에는 언제나 손님으로 떠들썩했지만 어쨌든 저녁에는 조용해졌고 무싯날에는 인적이 끊겨서 글쓰기에 그리 나쁜 환경은 아니었다. 거기서 단편을 몇 편 썼는데 '낙타누깔'을 쓰던 무렵의 일이다. 이 작품을 처음에는 현대문학의 김수명에게 갖다 주었더니 편집 도중에 못 싣겠다는 연락이 왔다. 아직도 월남전이 진행 중인 데다 참전의 부도덕한 점을 부각해서는 분명히 말썽이 날 것이라고, 몇 년 전에 남정현의 '분지'를 실었다가 편집자는 연행되었고 작가가 반공법으로 구속되고 재판까지 치른 뒤여서 편집인들이 더욱 민감하다고 양해를 구해 왔다. 그리고 다시 어느 시사 잡지에서도 되돌려 왔고 구중서가 괜찮겠다고 하여 가톨릭에서 내는 '창조'라는 잡지에 원고를 보냈다. 호준이의 분유가 떨어졌다고 해서 나는 더욱 돈이 필요하던 날에 명동성당으로 원고료를 받으러 집을 나섰다. 마침 수유리에 살던 화가 여운이가 가끔씩 집에 들르던 터라 그와 함께 나서면서 '오늘은 대포 한 잔을 사겠다'고 큰소리까지 쳤던 터였다. 그를 명동 뒷골목의 허름한 막걸리집에 앉혀 두고 혼자서 터덜터덜 성당 옆의 창조 잡지사 편집실로 찾아갔더니 어딘가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바로 그 전 호에 김지하가 '비어(卑語)' 연작시를 써서 잡지사가 폐간되어 버렸던 것이다. 나는 이 사연 많은 '낙타누깔' 원고를 찾아 가지고 주점으로 가서 앉자마자 절반으로 꺾어 쥐고 부욱 찢어버리며 푸념했다.

-내 다시는 이따위 나라에서 글을 안 쓸 테다!

찢어진 원고 뭉치를 동댕이치려니까 정 많은 여운이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형님, 내가 뒷간에 갖다 버릴 테니까 이리 주쇼.

여운이가 원고를 쥐고 화장실에 다녀왔고 그는 빈손이 되어 돌아왔다. 나는 그날 그가 외상으로 사주는 술을 잔뜩 얻어먹고 비틀거리며 우이동 골짜기로 돌아왔고 이튿날 술에서 깨자 대번 후회를 하게 된다. 아, 그까짓 탄압도 미처 받기 전에 어떻게든 동료 문인들과 표현의 자유를 되찾을 생각은 하지 못하고 몇 날 밤을 새워서 쓴 작품을 버리다니. 그야말로 작가로서 수치심과 자괴감이 가슴에 가득 차오르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무렵에 여운이 아내에게 슬며시 와서 원고를 되돌려 주었다는 데 찢겼던 부분은 모두 그가 말짱하게 스카치 테이프로 붙여 놓았다.

그림=민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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