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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청<57>진보당사건⑫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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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의문의 사나이 양명산, 그는 많은 수수께끼를 간직한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진보당사건의 수사관들은 죽산과 양명산의 사이는 북괴가 조종하고 이용한 흔적이 뚜렷하다고 말한다. 담당변호인이었던 김봉환변호사는 양명산의 죽산 접근이 애초부터 함정이었던 의흑이 짙다고 보고 있다. 반면 진보당사건피고인이었던 죽산주변 사람들은 당국이 공소유지가 어렵게되자 양을 등장시켰다고 보고있다.

<본명은 양리섭>
양이 1심에선 북괴와 죽산사이의 밀통을 시인했다가 2심에선 완전히 뒤집는등 재판과정에서 나타난 사실로 보아 양이 처음부터 죽산을 함정에 몰아넣은것은 아니라고 믿고 있다. 양명산이 수수께끼를 간직한채 갔다는것은 재판과정에서 제시된 여러가지 의문을 규명하는 심문이 미흡했다는 데서다.
그럼 양명산이란 사나이는 어떤 인물일까. 양명산의 본명은 양리섭, 사건당시는 51세였다. 평북 강계출신인 그는 l927년 중국 천진중학교를 졸업한뒤 곧바로 중국으로 건너가 곡물상을 하면서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운동자금을 후원했다. 부유한 집안 출신이던 그는 집에서 거액의 돈을 가져다 곡물을 화차에 싣고 중국에 내다 파는 그당시로서는 거상에 속했다. 그때 이름이 김동호.그래서 죽산은 진보당사건으로 재판점에 설때까지 양명산믈 김동호로 알고있었고 「김사장」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본명은 양리섭, 항일운동 시절엔 김동호, 그리고 HID요원으로서 남북을 내왕할 때의 이름이 양명산, 때로 양장자로 통했다.
양이 죽산과 처음 만난 것은 상해시절, 죽산이 코민테른(국제공산당)원간부 조선대표로 항일운동을 하던 때다.
그때 김동호는 장사를 하면서 항일운동에 자금을 후원하고 있었는데 상해임시정부가 발간하던 독립신문에 3만원이란 거액을 기부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시절 죽산은 상해의 프랑스조계에 살고있었다. 금동호 역시 이웃에 살았고 죽산의 재정후원자이기도 했다. 죽산의 따님 조호정씨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마기팔다 잡혀>
『내 이름의 호는 상해의 옛 지명 호강을 딴것으로 상해에서 낳았다해서 붙여진 거랍니다. 김사장이 약수동 저희집에 처음왔을 때 아버님이 김사장에게 저를 인사시키면서<저 애가 호정>이라고 했더니<응, 그래. 너가 상해에서 보던 그 애구나. 네가 그때 세살때였지>그러면서 제이름자의 풀이도 해주고 아버님과 감옥에 같이 있던 때의 얘기도 했어요. 어머님 얘기도하고…. 그날 저는 눈물이 글썽해졌어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잃어버렸던 어린날 돌아가신 어머님생각에…. 김사장은 눈이 크고 말도 적은 순박한 시골아저씨풍이었어요. 평안도사투리가 유별나게 강했고….』
양은 4년동안 독립운동을 돕는 생활을 계속하다 31년4월 일본경찰에 체포돼 신의주형무소에서 4년간 옥살이를 했다.
그는 형무소에서 죽산과 재회했다. 죽산은 양보다 먼저 이곳에 수감돼 있다가 얼마뒤 서울형무소로 이감됐는데 그 기간까지 약1년동안 신의주형무소에서 둘은 함께 죄수생활을 했다.
양은 출옥후 다시 국외로 탈출, 만주 통화 천진등지를 무대로 농장과 곡물상을 운영했다.
8·15해방후 귀국한 양은 신의주에서 「건국무역사」 를 차렸다. 그러다가 이듬해인 46년8월 노동당 평오시당과 연결돼 남북교역에 나선다. 당국의 기록에는 해방이듬해인 46년8월 남하한 그는 인천경찰서에 체포됐다가 곧 풀려나고 해상을 통한 북행을 준비하던중 다시 미군CIC에 체포돼 조사를 받았으나 곧 석방되었다. 그는 이 무렵 인천서 죽산을 잠시 만났던 것으로 기록돼있다. 양은 그해 12월 육로로 개성을 거쳐 평양으로 돌아가 건국무역사를 운영해왔다.
양은 6·25때 남하해 전쟁중 대구 부산등지를 옮겨다니다 휴전후 강원도 속초에 자리를 잡고 해산물상회를 차려 평범한 생활을 했다.
그러던 양이 남북을 내왕하게된것은 55년. 양리섭은 55년3월 평양시절 장사관계로 교분이 있던 김동혁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이북의 부인이 월남해 왔으니 급히 서울로 오라>는 것. 양은 서울에 와 김동혁을 만났더니 편지와는 다른 뜻밖의 제안을 했다.
『나는 미군첩보기관의 공작선을 타고 남북교역을 하고 있다. 나는 북으로 가면 황해도연백군의 돌개포에서 북괴의 대남교역기관인 선일사(일명 삼육공사)에 연결된다. 그런데 5월초 북에 갔을때 선일사책임자인 김난주가 양형의 안부를 물었다. 그는 당신이 속초에서 해산물상회를 하는데 어렵게 지내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한번 만났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니 나와 함께 남북교역을 해보지 않겠느냐』 는 얘기였다. 북의 김난주는 양리섭이 평양에서 건국무역사를 운영할 때의 작원으로 양의 도움을 받은 인물이었다.
양은 김동혁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날 파고다공원으로 가서 김동혁과 나란히 사진을 찍었다.
김난주에게 양리섭과 연결됐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사진이었다. 김동혁은 북으로 가 이 사진을 보이고 『양과 연락이 닿았으며 남북교역을 하고 싶어한다』 고 전했다. 김난주는 잘됐다면서 다음에 함께 북으로 와도 좋다고 승낙했다.
이리하여 그해 5월 양은 김동혁과함께 미첩보기관의 공작선을 타고 돌개포로 갔다. 양은 이곳에서 선일사의 요원이라는 황모의 인도로 해안의 지정된 숙소에 안내되었다. 북괴간행물들만 잔뜩 놓여진 이 가옥에서 그는 사흘을 보냈다. 사흘만에 그는 선일사로 안내돼 김난주를 만났다. 김난주는 교역물품을 알려주고 2백50만환에 해당하는 북의 물품을 양에게 주었다.
이로부터 양은 미군첩보기관과 북의 대남교역및 첩보기관인 선일사의 양해아래 남북을 내왕하는 교역상인이 되었다. 그는 6월과 7월 두차례 김동혁과 함께 남북을 내왕하며 교역을 했다.
그런데 그해 8월 김동혁이 북에서 가져온 모르핀을 처분하려다 마약불법소지로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이 사고로 양의 북항루트도 끊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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