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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 탁상행정 … 소비자만 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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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미 기자 중앙일보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박유미
경제부문 기자

오보를 냈다. 다음달 30일부터 신용카드로 50만원 넘는 금액을 결제하려면 신분증을 챙겨야 한다고 보도했다. <본지 11월 25일자 18면> 그러나 앞으로도 지금처럼 금액과 상관없이 신용카드 쓸 때 신분증을 제시하지 않아도 된다. 금융위원회에서 이틀 만에 없던 일로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정부의 규제 완화 방침에 역행하고 소비자 불편이 가중된다는 여론에 밀렸다.

 이번 사달의 발단은 다음달 예정됐던 여신금융협회의 신용카드 개인회원 표준약관 개정에서 비롯됐다. 여신협회는 약관을 고치면서 상위 규정인 금융위원회 감독규정 조항을 그대로 베껴 넣었다. 2002년 만든 감독규정(24조의6)엔 50만원 초과 거래 시 카드 가맹점이 고객의 신분증을 확인하도록 돼 있다. 그런데 이 규정은 이미 사문화된 지 오래다. 현실에선 어느 식당·상점을 가도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여신협회는 아무 고려도 없이 신용카드 표준약관에 이미 죽은 규정을 넣었다. 카드 사용자들의 반발은 예견됐다. “남편 카드를 쓰고 있는데 백화점에 갈 때마다 남편을 데려가야 하느냐” “자녀가 내 카드를 쓰고 있는데 카드와 신분증을 함께 줘야 하냐” “요즘 50만원 넘는 결제는 흔한데…” 등 현실적이지 않다는 불만이 쏟아졌다. 그런데도 금융당국은 이틀 전까지 “남의 신분증을 내놓는 것도 불법인 만큼 본인의 명의로 된 가족카드를 만들라”는 원론적인 답변만 내놨다. 비난 여론이 들끓자 26일에서야 금융위는 “50만원 초과 거래 시 신분증을 확인하는 내용의 감독규정은 사실상 사문화된 만큼 이를 폐지하겠다”며 “서명·비밀번호 등 다른 방법으로 확인하겠다”고 물러섰다.

 감독규정 개정은 규제개혁위원회와 입법예고 등을 거쳐 한 달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표준약관을 개정하려다 12년 된 낡은 상위 규정을 고치게 되는 우스꽝스러운 모양새가 됐다. 올해 금융업계에는 소비자 편익과 관련된 다양한 이슈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카드사 고객 정보유출과 같은 대형 사고뿐 아니라 ‘천송이 코트’로 대표되는 간편결제 등 잠재돼 있던 문제들이 불거졌다. 그때마다 금융위·금감원과 카드업계 간의 소통 문제가 불거졌다. 금융당국은 ‘규제 완화’와 ‘소비자(정보) 보호’라는 두 가치 사이에서 여론에 따라 ‘갈지(之)자’ 걸음을 걸었다. 금융사들은 당국의 눈치를 살피며 변명만 내놨다. 서로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한 동안 소비자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처음부터 소비자 입장에서 어떤 가치가 먼저인지 고민해보고 장기적인 계획을 세웠다면 결과는 지금과는 천양지차였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번처럼 황당한 오보를 내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

박유미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