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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시정의 야전사(한일 의원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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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일본교과서 왜곡파동의 와중에서 한일의원연맹의 존재와 역할이 크게 부상됐다. 양국 의회차원에 머물렀던 과거의 활동에 비해 이번 교과서파동에는 연맹이 양국의 중요한 대화창구로 활용됐고 앞으로 구체적인 왜곡시정작업에도 연맹이 중요역을 맡을 가능성이 크다. 특위가 과연 우리측 주장을 얼마나 관철시킬 수 있을 것인지는 국민적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의원연맹의 성격·역할·앞으로의 활동방향 등을 알아본다.
○…3일 인선이 완료된 13인특위는 일본측의 「교과서대책특위」가 13인으로 구성되어 있어 여기에 맞춘 것 같은 인상.
l3인특위 전신인 8인소위가 비교적 「경량급」의원으로 구성된 데 비해 13인특위는 연맹에 관여하고 있는 각 정당의 중량급인사를 다수 포함했다.
일본의 특위도 10선에 우정상을 지낸 하라다·겐(원전헌) 위원장을 비롯, 「교과서특사」로 내한했던 자민당 문부회 소속의 모리·요시로(삼희낭) 미쓰즈까·히로시(삼총박)의원 등이 포함된 강팀으로 알려져있다.
일본측이 이같이 중진으로 구성한 것은 일본내각에 대한 발언권강화를 노린 것으로 우리측 특위와의 합의내용이 그대로 일본정부 정책에 반영될 가능성은 크다고 볼 수 있다.
특위의 활동목표는 △일본검정지침 개정 △문교광보의 내용에 우리측 의사반영 △한일관계의 재정립에 둘 예정인데 이달 중 동경에서 양국특위멤버들의 합동회의를 열어 구체적이고도 실무적인 협의를 하게된다.
동경에서 1차 합동회의를 갖는 것은 우리국민들의 요구사항을 상대방에게 제시하고, 한국의 여론을 그곳까지 확산시킨다는데 뜻이 있으며 10월중 2차회의를 서울에서 갖고 최종매듭을 짓는다는 것.
특위는 일본측에 이미 제시한바 있는 1백72개의 왜곡사실 중 가장 문제가 되고있는 「3· 1운동의 폭동화」등 10여개 항목에 대해 명백한 현장교육지도 지침을 문교광보에 반영토록 하고 그밖에도 고대사에서 현대사에 이르는 모든 왜곡부분에 대해 전반적인 검토를 할 예정이다.
○…특위의 본격적인 활동을 앞두고 연맹측은 그 뒷받침 문제로 고민.
현재 연맹사무국 직원6명(고용직 제외)으로는 그 방대한 자료분석과 회의준비가 어렵기 때문에 정부측의 뒷받침이 꼭 있어야 한다는 게 연맹측의 요청이다.
구체적인 절충에 들어가면 문구하나를 둘러싸고도 치열한 논쟁이 예상되는데 실질적으로 준비된 게 하나도 없는 것이 문제라는 것.
연간 2억4천만원(81년 기준)의 예산으로는 필요한 전문가확보나 활동비조달에 미달해 이번 기회에 연맹활동비를 국회예산에 떳떳이 포함시켜 연맹활동을 보다 공식화하고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교과서 문제에 관한 한 이제까지 친한파로 알며졌던 인물들이 더욱 강경하다』는 동경으로부터의 보도는 연맹간부들을 무척이나 당혹시켰다.
일본 각의에서 교과서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했던 나까가와 이찌로(중천일낭) 과기처장관이나 『일본에 매국노가 있다』고 발언하여 일본 사회당으로부터 해임요구를 받은 미노와·노보루(기륜등) 우정상 등은 평소 연맹 내에서 친한파로 꼽히던 인물.
교과서 검정제도강화에 선봉을 선 다나까·다쓰오(전중룡부) 의원도 전 한일 경제협력위 사무총장이었고 현재는 연맹부회장으로 중일전쟁을 일으켰던 다나까·기이찌(전중의일) 전 총리대신의 아들. 대부분 친한파란 사람들이 자민당의 우파여서 검정제도 자체를 폐지하려는 사회당 및 일본 총평·교원노조 등 좌파와 대치하고 있는데서 이런 현상이 초래됐다는 얘기다.
안중근 의사를 비난했던 마쓰노(송야행태) 국토청 장관은 자신의 발언이 한일관계에 물의를 일으키자 연맹을 탈퇴했다.
현재 한일의원연맹 일본측 회원은 3백7명. 일본 중·참의원 7백63명의 40%에 이른다(우리측은 2백7명).
○…의원연맹의 전신은 72년3월 발족된 한일의원 간친회.
75년7월 제5차 서울총회 때 의원연맹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초기에는 양국 의원들이 각기 국내여론을 의식하여 가입을 꺼리는 바람에 한국측 13명, 일본측 48명 등 불과 60여명으로 발족됐다.
연맹으로 개편되면서 일본측도 자민당 외에 민사당 의원들이 가입했고 제5공화국 출범이후 대폭적인 세대교체와 함께 체질개선을 겪게 됐다.
인물중심의 운영에서 기구중심으로 활동패턴도 바뀌었다.
제5공화국 출범이후 처음으로 열린 81년의 서울총회 때부터 비로소 회의가 우리말로 진행되면서 동시통역을 시작했고 총회참석도 일본의원들이 자비로 부담했다.
이때부터 총회 외에 △사회·문화 △경제 △안보·외교 △재일한국인 지위향상 특위 등 산하기구의 위원회가 동시에 열띤 주제발표와 토론을 가졌다.
그러나 이같은 기구와 인원의 대폭적인 교체는 새로운 문제를 파생시키기도 했다.
간사장과 상임간사 1인체제로 운영되던 연맹이 부회장(8명), 부간사장(9명), 상임간사(40명)등으로 대폭 확대되자 일본측은 『누구를 상대로 해야하느냐』는 의문제기와 함께 「언어의 장벽」때문에 60대 이상은 점차 의욕을 잃어가는 경향이 없지않아 이에 대한 적절한 대책이 요청되고 있다. <고흥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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