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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철도999, 수원 폐허 마을에 희망의 기적 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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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경기도 수원시 인계동 주민들이 빈집 외벽을 형형색색의 벽화로 단장하면서 마을 분위기도 환하게 바뀌었다. 지나던 행인들이 은하열차999 그림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다. [사진 수원시]
새단장 전 모습. [사진 수원시]

2006년 재개발 바람이 불자 경기도 수원시 인계동 일대는 크게 들썩였다. 보상을 받고 떠나는 주민들과 목돈을 들고 찾아오는 외지인들로 늘 북적였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개발 거품이 빠지기 시작했다. 외지인들은 헐값에 집을 팔고 떠났고, 빈집은 새 주인을 찾지 못한 채 쓰레기장으로 변했다. 중고생들의 탈선 장소라는 오명도 썼다. 남은 주민들도 페인트칠조차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동네 골목은 더욱 을씨년스러워졌다.

 지난 23일 찾아간 인계동 골목은 전혀 다른 동네로 바뀌어 있었다. 동네 미술학원 학생들과 주민들은 골목골목마다 노랑·빨강·파랑의 색을 입혔다. 빈집에 있는 쓰레기도 말끔히 치웠다. 모은 쓰레기만 3t에 달했다. 빈집은 협궤열차의 기관차로 변신했다. 어두웠던 골목엔 조명과 비상벨을 설치해 밤에도 안전하게 다닐 수 있게 됐다. 흉칙했던 폐가는 주민 소통의 공간으로 변신했다.

 수원 구도심의 슬럼가로 불리던 인계동 일대가 웃음꽃 피는 활기찬 동네로 탈바꿈했다. 동네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힘을 모아 새 동네 가꾸기에 앞장서면서다. 아무도 찾지 않던 폐허 마을의 변신은 지난해 초부터 시작됐다. “우리 자녀들이 사는 마을을 언제까지 이렇게 방치해 둘 거냐”는 목소리가 하나둘 모이면서 자연스레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아이디어가 “누구나 와서 걷고 싶은 올레길을 만들자”는 거였다.

 마침 수원시가 올해 초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 사업’ 공모에 나섰고, 인계동 주민공동체가 제안한 ‘인계올레길’이 당당히 1등을 차지했다. 주민들은 지원금 1억원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인계올레추진단’을 구성했다. 최중한(63) 인계올레추진단장은 “이젠 바꿔 보자는 주민들 마음이 이심전심 통하면서 새로운 동력을 얻게 됐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인계올레길 조성 작업에 본격 나섰다. 외부 자문까지 받아 총 5곳에 15㎞ 길이의 올레길을 만들었다. 이름도 ‘햇살 가득 다울길’ ‘베토벤과 걷고 싶은 장다리길’ ‘예술이 숨쉬는 테마길’ ‘드라마 공원길’ ‘담 없는 녹색길’ 등 특색있게 지었다.

 올레길 꾸미기에도 주민 2000여 명이 직접 팔을 걷어붙였다. ‘햇살 가득 다울길’은 만화 캐릭터와 추억이 담긴 1㎞ 코스의 벽화골목으로 꾸몄다. 동네 미술학원의 재능기부를 받아 골목 곳곳에 화려한 원색을 입혔다. 스머프를 잡기 위해 모퉁이에서 엿보는 가가멜부터 피아노 건반 계단, 기린 계단 등 다양한 아이디어가 속출했다.

 추억의 수여선(수원~여주를 오가던 협궤열차 노선)도 복원시켰다. 쓰레기 집합소였던 빈집 외벽에 협궤열차를 그리고 바닥엔 멍석을 깔아 기찻길로 만들었다. 맞은 편 벽에는 당시 열차와 이용객들의 사진도 걸어놓았다.

 ‘예술이 숨쉬는 테마길’은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인 나혜석을 기념하는 나혜석 거리와 국제자매도시 테마거리, 경기도 문화의전당 등을 잇는 6㎞ 코스로 조성됐다. 자매도시 테마거리에는 호주 타운즈빌 등 세계 16개 도시에서 가져온 미니어처 조형물이 세워졌다. 타운즈빌의 화강암 벤치, 러시아 니즈니 노브고로드의 크렘린 타워, 인도네시아 전통악기인 알쿨룽 등이 대표적이다.

 ‘베토벤과 걷고 싶은 장다리길’은 복개천 위에 마련됐다. 매년 10월 말 장다리길 반달공원에서 베토벤 바이러스 음악회가 열리는 데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드라마 공원길’은 KBS 수원 드라마센터와 수원청소년문화센터 간 외곽길 5㎞를 산책길로 꾸몄다. ‘담 없는 녹색길’은 현재진행형이다. 지역주민들이 각자 사는 집의 담을 허물어 공용 주차장을 만드는 사업이다.

 동네가 바뀌고 골목이 밝아지면서 주민들도 웃음을 되찾아가고 있다. 주민 홍용선(67)씨는 “이게 사람 사는 곳인가 싶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정말 살 만한 동네로 바뀌었다”고 반겼다. 최 단장은 “주민들 스스로의 힘으로 올레길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보람이 크다”며 “앞으로도 길이 잘 관리되고 더욱 활성화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임명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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