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일 국교 정상화 17년|풀어야 할 숙제들<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일제 식민통치 35년, 국교공백기 20년을 거쳐 한일국교가 재개 된지 17년. 비록 국교는 열렸지만 한일관계에는 아직도 청산되지 못한 과거의 유산물이 숱하게 남아있다.
그 중에는 당시 교섭과정에서 부분적으로만 해결을 보았거나 장래의 과제로 아예 미뤄진 것도 있고, 국교 재개 후 증폭된 것도 있다. 우선 재일 동포들이 법적·사회적으로 받는 차별과 수모는 시급히 해결돼야할 과제다.
또 일본이 일방적으로 강행한 북송동포의 문제, 일제에 의해 징용으로 끌려갔다가 귀향하지 못한 사할린 동포들의 문제, 일본인들이 빼돌린 값진 문화재 반환문제, 원폭피해자 문제 등등.
미해결의 유산은 헤아리기도 어렵다. 거기에 무역 역조와 기술이전 등 새로운 미해결의 문제가 추가되고 있다. 이러한 미결문제들을 미결의 현장에서 증언을 통해 재조명해 본다.

<편집자주>
『일본은 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때 이미 다 해결된 문제라고 발뺌합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들 5만 원폭피해자 문제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었습니다. 우리 정부에서는 지금까지 이렇다할 대책을 세워주지 않고 있고요. 우리는 과연 누구에게 빼앗진 인생을 보상받아야 합니까.』

<중노동도 서러운데>
전국에 아직 남아있는 2만 5천 여명의 원폭피해자 중 한사람인 안영수씨 (62·서울 진관외동 300). 한일 간에 풀어야할「미결의 여러 과제」가운데서도 한국인 원폭피해자 문제는 『일본의 양심을 재는 척도』라고 말한다.
『한국인인 우리들이 왜 바다건너 일본에 가서 원폭을 맞아 죽거나 병신이 되어 돌아와 인생을 저주하며 살아야 했습니까. 일제의 한국침략과 야만적인 식민통치 말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안씨가 원폭을 맞은 것은 1945년 8월 6일 일본 광도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집에 있었습니다. 일본은 2차대전이 막바지에 이르자 지원병을 뽑아가기 시작했어요. 말이「지원」이지, 사실은 강제였지요. 왜군의 총알받이가 되기는 싫고 궁리 끝에 당시 살던 서울 효자동사무소에 직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강제지원을 면할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웬걸 1년도 못돼 징용 영이 내렸습니다. 공무원들이 솔선해야 한다고 해서 꼼짝없이 붙잡혀 동네사람 11명과 함께 일본으로 끌려갔지요. 광도의 삼능 조선소에 배치돼 하루 15∼18시간씩 중노동을 했습니다. 이 때가 44년 가을이었습니다.』
당시 광도에는 안씨처럼 끌려갔거나 국내에서 살수가 없어 이주해간 한국인이 약 8만명, 이듬해 일본은 본토마저 B-29의 공습에 유린되기 시작했다. 지구상에 유사이래 처음 원폭이 터지던 역사의 그 날, 45년 8월 6일 상오 8시.

<죽은 한국인만 5만>
『아침을 먹고 난 7시 50분쯤 다급하게 공습경계경보가 내렸습니다. 그런데 적기의 소재는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때까지 광도는 단 한번도 공습이 없었기 때문에 비교적 평온한 분위기였습니다. 공장건물 밖에 널린 기계들을 치우고 있는데 순간 번쩍 빛이 스쳐가며 온 세상이 노래지더군요.
현기증 같은 것을 느끼면서 가만히 서 있었어요. l, 2초쯤 뒤「꽝」하는 일발의 굉음이 들려왔습니다. 그리고는 4㎞밖 시내에서 버섯 같은 구름이 하늘 까마득히 치솟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원폭인지를 몰랐다고 했다. 그러나 그 한발로 인구 60만의 광도 시는 폐허가 되고 말았다. 『잠시 후 시내로부터 피투성이가 된 환자들이 조선소 병원에 떼를 지어 수송되기 시작했어요. 어떤 환자는 걸어오다 퍽 쓰러지기도 해요. 피부가 온통 벗겨져 누더기 옷처럼 너덜거리고 있었습니다. 구조반으로 시내에 나가봤더니 거리마다 시체가 깔려 있었습니다. 폭탄이 터지던 그 순간의 자세 그대로 외상도 없이 말짱하게 쓰러져 죽은 시체도 많았습니다. 그 때는 그것이 원폭인지 몰랐고, 방사능 오염지역을 쏘다니면 안 된다는 것도 몰랐었지요.』
이어 8월 9일 장기에 두번째 원폭이 터졌고 8월 15일 왜왕 유인은 항복을 성명 했다. 명치유신 이후 70여년 제국주의 침략의 끝장이었다.
이 두 도시에 징용·징병·보국대·정신대 등으로 강제 연행되거나 일제의 약탈로 고국에서 생활근거를 잃고 생계를 찾아 유랑해 노무자 등으로 일하던 한국인은 약 11만명. 광도가 8만명, 장기가 3만 여명이었다. 이중 원폭피해자는 약 10만명.
5만 여명이 폭격 당시 일본인들과 함께 떼죽음을 당했고 5만 여명은 살아남아 해방 후 귀국했다.
그러나 생존자 중 상당수는 폭격 당시의 부상으로 귀국 후 제대로 치료도 못 받고 숨졌다.
『원폭 병이라는 것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피폭이 원인이 돼서 백혈·빈혈·다혈·혈소판 감소증 등 조혈기질환·간기능 장애·내분비 성장애·각종 암·신경장애·백내장 등 거의 모든 질병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무슨 병인지도 모르고 죽은 사람이 수도 없을 겁니다. 벌써 37년인데 중증환자는 사실상 이미 다 죽은 셈이지요.』
안씨도 원폭에 직접적인 상처는 입지 않아 당시에는 아무 탈이 없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해방 이듬해 귀국, 의류제조업 등을 해온 안씨는 30대를 넘으면서 간접피해의 후유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을 해도 금방 피로해지고 마는 증세로 의욕대로 활동을 할 수가 없다는 것. 상처가 나면 아물지 않고 소화가 잘 안되며, 이유 없이 토하는 증세도 나타났다. 병원에 가서 내시경 검사를 해도 위에는 이상이 없다는데 1주일에 한두 번은 이유 없이 구토를 해 견디기가 어렵다.
자신의 증세를 원폭과 관련짓게 된 것은 60년대 이후. 원폭 방사능에 장시간 노출된 때문인 것으로 진단을 받았다.
원폭피해자들은 65년 한일 회담에서조차 자신들의 문제가 외면당하자 67년 7월「한국 원폭 피해자협회」를 조직했다. 우리정부와 일본정부에 진정·건의 등으로 대책을 요구하며, 17년째 자구의 투쟁을 벌이고 있으나 별 성과가 없다.
73년 일본 민간단체인 핵금 회의에서 합천에 원폭 진료소를 세웠으나 위치가 벽지인데다 전문의료 요원도 없어 유명무실한 실정.

<요즘도 잦은 구토증>
일본 정부는 몇 차례『대책을 강구하겠다』는 언질을 주었으나 말뿐이다. 『원폭 피해자문제는 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때 이미 해결됐다』는 태도를 고수하며 시간만 끌고 있다. 지난해부터 한국인 피해자를 1년에 50명씩 일본으로 데려다 치료해 주기로 한 것이 정부차원에서는 유일한 실적.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50명이 일본에 간다. 치료기간은 두달, 생색뿐이다.
『일본인 의사가 와서 대상자를 선발해 가는데 중증환자는 데려가지 않습니다. 1년에 50명이면 10년 해야 5백명 입니다. 10년 내에 현재 남아있는 환자의 상당수는 또 죽을 겁니다. 결국 생색만 내며 시간을 끌어 해결하자는 속셈으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한국 원폭 피해자협회 회장 신영수씨(64)의 말이다.
협회의 조사로는 현재 전국에 2천 여명의 중환자, 1만 여명의 경환자 등 모두 2만 5천명의 원폭피해자가 있다. 그 대부분은 원폭의 후유증으로 제대로 경제활동을 못해 가난과 병고의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신 회장은 우리정부에 그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대일 교섭을 통해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성의를 보이지 않고 있다고 했다. <문병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