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와 국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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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가또 (가등) 교수는 일본의 저명한 사회정압병학자이며 또 극진한 친한파이기도 하다. 지난해 그는 바쁜 서울거리를 거닐다 문득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요즈음 일본사람들은 한국을 참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바짝 뒤쫓아오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언젠가 한국이 일본을 능가하는 날, 어쩌면 우릴 쳐들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지요. 우리가 한국에서 한 것이 있거던요... 하지만 한국은 일본을 이길 순 없읍니다.』 당황한 듯한 내 시선을 아랑곳하지도 않고 그는 말을 이어갔다.
『보세요. 당신네들은 책을 읽지 않습니다. 책을 멀리하는 국민이 책 읽는 국민을 이겨 낼순 없읍니다. 더구나 현대과학전에선 말입니다.』나는 할말이 없었다. 창피스런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그때처럼 버스정류장에 우두커니 선 저 많은 사람들이 미워진 때가 없었다.
그는 이런 내 심경을 꿰뚫어 보듯 나를 위로했다.
『한국의 독자만 탓하진 마십시오. 쓰는 사람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교수나 학자들도 어렵게 써야 체면이 선다는 허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책이란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읽으면서 유익한 것이어야 합니다. 이게 곧 과학의 생활화에 지름길이 되는 것입니다.』 위로가 아니고 더 따끔한 일침이었다.
교과서 왜곡시비로 나라 안팎이 시끄러운 요즘「가또」교수의 말은 내게 많은 의미를 깨우쳐 주고 있다.
다행한 일은 초반의 흥분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냉철한 이성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우리 국민의 자세다. 국력을 배양하고 실력을 쌓아야 한다는 쪽으로 여론이 수렴되어지고 있는 것같다. 그렇다. 그 길뿐이다.
힘이 없어 맞는걸『얘 좀 보세요』하고 세계 여론에 응석이나 부리는 것 같은 짓은 이제 그만 둬야한다. 세계는 지금 실력대결의 장에 들어서 있다.
이제 우리도 실력을 쌓을 구체적 방안을 생각할 때다.
내 작은 주장은 우리도 열심히 책을 읽자는 것이다. 하긴 독서가 어디 이 때문만이야 아니겠지만... 풍요로운 인생의 밑거름이 되는 책을 우린 너무 멀리하고있다.
이 바쁜 세상에 무슨 책이냐고 반론을 펴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것 아니라도 신경 쓸 일이 많은데 하고 말이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일은 일상에 쓰는 신경과 책에 대한 지적도전과는 질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책을 읽고 사삭한다는건 중추신경세포의 기능을 촉진, 활성화시킴으로써 그게 곧 노화방지가 된다는 사실이다. 교수나 연구가가 늙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사업에 골치가 아플수록 책을 읽어야 한다. 그게 곧 정신치료제요, 젊음의 비결이다.
정 싫거든 대충 훑어보기만 하라. 수험공부 하듯 꼼꼼하게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 책이란 끝까지 다 읽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정독을 요하는 것도 아니다. 관심 있는 부분의 몇 줄만 읽으면 그로써 충분한 것이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며칠 걸려 책 한권 읽느니 TV나 영화 한편 보는 쪽이 빠르기도 하거니와 시각적 영상미까지 곁들이니 더욱 효율적이고 감동적이라고.
하지만 영상매체는 내가 지루하다고 넘겨버릴 수도 없고, 더 보고싶다고 되풀이 할 수도 없는 선택의 자유가 없기 때문에 일방통행이다. 생각할 것도 없이 우두커니 앉아만 있어야 하기 때문에 TV를 이른바「바보상자」라고 하지 않는가. 책이란 지루하면 몇 장을 넘겨도 되고 또 감동 깊은 장면, 힘든 대목에선 잠시 책을 덥고 깊은 사색에도 빠질 수 있다. 나름의 생각을 하는 이 순간은 저자의 지식을 전수 받는 수동의 자세가 아니다. 스스로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발휘하는 창조의 순간이다.
사실 책을 읽는다는 건 곧 쓴다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게 독서의 진수일 것이다.
책은 인생의 지침서요, 국력의 원동력이다. 우린 그동안 너무 책을 소홀하게 다루어 왔다. 책에 관한 한 나의 체험담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나도 몇 권의 저서를 펴냈다. 그때마다 나는 평소 아껴주는 분들에게 자랑삼아 보내곤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독후감은 커녕 잘 받았노라고 감사전화라도 한 사람은 고작 서너 사람뿐이었다.
아니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하도 억울하고 답답하여 책을 많이 펴낸 선배 한 분에게 하소연을 했다. 그 선배는 방긋이 웃더니 이런 충고를 하는 것이었다. 『그 사람들에게 소주를 한 병씩 보내주시오. 이게 웬 술이냐고 금방 전화를 할겁니다.』그러나 나는 아직 술을 보내보진 않았다. 그 결과가 너무 나를 비참하게 만들 것 같은 두려움에서다. 나는 지금도 그 집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을 내 책들을 생각하면 못내 가슴 아프다. 고이 길러 시집 보낸 딸이 소박을 맞고 우는 그런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뿐 아니다. 왜 책 한 권 안 주느냐는 성화도 더러 듣는다. 한 권 주면 내 체면보고 읽어나 주겠다는 모양이다. 참 서글픈 일이다. 어느 나라 저자가 독자로부터 이런 수모를 당해야하는지 정말 궁상스런 이야기다. 돈 몇 푼이 아까와 책을 안 사는건 아닐게다. 책이란 읽기에 골치 아픈 존재란 선입관이 박혀있기 때문이다.
쓴다는 건 살을 에는 각고의 과정이다. 퇴근 후 대포 한잔도 외면하고 도서관에 틀어박혀야 하고 남들이 좋다는 휴가도 못 가고 원고와 씨름해야 한다. 내 책을 받고도 까맣게 잊어버리고있는 친구들에게 한마디 부탁하고 싶은 말이 있다. 제발 그 책을 찾아 잘 보이는 곳에 꽂아달라고. 자기가 읽기 싫으면 차라리 다른 사람이라도 읽게 말이다.
이제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분다. 가을의 문턱에 섰다. 독서의 계절이다.
「가또」 교수의 그 자신만만한 발언에 면박을 주기 위해서, 아니 우리의 인생을, 국력을 보다 살찌우기 위해서 우리 모두 열심히 책을 읽자.<김정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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