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틴 활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54년 서울로 수복한 다음 해에는 Y틴이 하이Y와 활동하지 않고 단독으로 이화여대에서 하령회를 가졌다.『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자』라는 주제로 1백20명의 여고생들이 참석했다.
58년까지 단독으로 해오다가 59년에는 오랜만에 다시 하이Y와 합동으로 하령회를 가졌으나 다시 다음해 부터는 단독으로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는 그들의 중요한 행사다. 하령회가 끝나면 총회가 있게되는데 Y틴 협의의의 임원선거와 앞으로의 중점에 대한 결정도 여기서 하개 된다.
대개 하령회는 수련회와 캠프의 성질을 띤 모임으로 이기회에 전국 각지에서 대표로 참석한 1백여명의 중·고등학생들은 서로를 알 기회와 전문지식인들과 늘 말로만 들어오던 명사들의 강연도 들을 기회를 갖게 되어 귀중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이들이 사업으로 택해온 활동들은 그 종류에 있어서 다양하며 특히 이런 모임을 통해 민주시민의 자질을 높이며 프로그램이나 활동을 통해 그들의 생각은 넓어지며 정신이 자라는 것이다. 그들이 한 일들 중에 중요한 것을 들어보면 56년 당시 이스라엘의 침략으로 고난을 당하고 있는 요르단의 Y틴들을 돕자는 결의를 했다.
그들은 1백달러를 모아 요르단에 보냈다. 58년에는 문화교류를 위해 우리들의 중요한 문화자료와 문화활동을 사진으로 모아 스크랩북을 만들고 인형과 한국고유의 노리개를 직접 만들어 각국 Y턴에 보내기도 했다. 또 국내 활동으로는 농촌지역에 고무신 수백켤레(모금한돈으로)를 사서 보 낸 일도 있었다.
59년에는 YMCA 하이Y와 함께 모금하여 2백64만6천환이라는 거금을 만들었다. 그때는 태풍 사라호가 해일을 일으켜 유례없는 큰 피해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가산을 잃고 불쌍하게 되었던 해였다. 그래서 모금한 금액을 사라호 피해자 구호금으로 보냈다.
그래서 당초에 계획했던 세계난민구호기금은 목표액 반쯤만을 UN난민구재기구에 보냈고 UN에서는 오스트리아에 있는 소년·소녀을 위한 캠프장에 보냈다고 한다.
언뜻 보면 오스트리아라고 하면우리만 못할 것 없는 나라지만 이 캠프장은 불우한 소년· 소녀들의 캠프장인만큼 우리나라도 이제 남을 도와 줄 수 있다는 생각믈 10대 학생들에게 하도록 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어디까지나 서로 돕고 도움을 받아야 할때 도움을 받는 그 일이 곧 Y가 지향하는 것임을 이 기회에 배웠을 것이다.
Y틴부는 대학생부와 분리되면서 지방Y에 소속하는 구조가 되었다. 대개의 클럽활동은 지방Y에서 하게 된다. 대학생들이 지도자가 되어 그들의 활동을 돕는다.
40주년을 맞이한 62년에는 7O여 중·고등학교에 Y틴 클럽들이 있게 되었고 회원수도 3천명이나 되었다.
80년대에 들어서는 활동의 제한을 많이 받음 으로해서 대학보다는 총 나아도 회원수가 많이 줄었다. 이는 학교 재량에 맏긴다는 말의 의미가 왜곡되어 이해된 때문인 것 이라고 하는 때 시청되기를 바랄 뿐이다.
적십자사 청소년부의 보이스카우트, 걸스카우트는 인정된 단체라고 지정되었기 때문에 이 두 그룹의 활동은 재제가 없으면서 Y틴 활동에는 많은 제재가 가해진다고 지방Y들로부터 이를시정해 달라는 요청이 자주 오고 있다.
그들의 건전한 활동은 책임있는 시민이 될 수 있는 길을 터 준다고 보아 오히려 국가나 사회가 다같이 권장하고 격려해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Y틴의 활동은 소규모이지만 세계를 합한 것이며 동시에 내 나라안에 있는 같은 또래를 위해 조금이라도 도옴을 주고 그런 일을하는 가운데 배우고 섬실하게 자란다.
60년대에 이르러 Y틴은 많이 커졌고 회원이 증가함에 따라 문제가 되는 것은 지도자의 부족이 었다.
그래서 전국 지도자 강습회를 57년 처음으로 가져 53명을 훈련 지도하기도 했다.
Y틴에 대해 소개하는 책자도 여러번 나왔다.
62년 현재 각지방별 Y틴 회원수는 서울 1천5백명, 광주 2백50명, 군산 80명,부산 1백70명,대구 1백20명, 대전 1백30명, 조치원 80명, 수원 1백명, 이천 60명, 청주 60명, 강경 80명.
전국적으로 클럽은 1백30개나 되며 학교는 70여 학교가 된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