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5. 불꽃을 따라서 <210>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나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연기가 오르는 담배를 여전히 뒷전에 감추고 서 있었다.

-야 그냥 피워라 펴. 나두 한대 주라.

나는 그의 명찰을 보고 그가 교내 신문에 썼던 산문을 기억해냈다. 제목이 '아스파라거스'였는데 첫 문장이 이랬다. '아스파라거스, 아! 얼마나 이국적인 이름이냐'. 나는 성진이 상득이 등과 이 문장을 외우며 킬킬대곤 했다. 그의 모더니스트다운 출발이었다.

이문구와 문협 사무실에서 처음 인사했다. 같은 해에 신춘문예로 나간 조해일과 함께 방문해 달라는 연락을 받고 갔더니 원고 청탁을 했다. 이문구는 머리가 굽실거렸고 큰 덩치에 줄이 쳐진 '도꾸리 세타'를 입고 있었다. 투박한 충청도 사투리 때문에 그는 도회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이문구는 처음 보는 우리에게 큰소리로 농담을 해대며 거침이 없었다. 나중에야 그가 술자리에서나 떠들지 보통 때에는 낯을 가리고 수줍어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한남철의 소개로 조태일과도 알게 되었는데 역시 이문구처럼 덩치가 크고 남도 사투리를 했고 술잔을 단숨에 비우곤 했다. 김승옥은 한 해쯤 지나서 이문구가 소개를 했든가 그랬다. 하여튼 이들 모두가 뱀띠로 나보다 두 살씩 위였다. 도대체가 내 또래는 한 사람도 없었다.

김지하는 그 무렵에 '오적'을 써서 중앙정보부에 연행된 뒤에 조사를 받고 마산 요양원에 강제 입원되었다. 청진동 일각에서는 젊은 문인들을 중심으로 뭔가 문인협회와는 별도의 현실에 대한 대응을 하게 될 조직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모이기 시작했다. 염무웅의 우이동 집에서 이호철, 한남철, 박태순, 등등이 모였는데 이 자리에서 '문인공제회' 얘기가 나왔다. 그리고 범문단적으로 수유리에 야유회를 가기로 했다. 야유회 장소는 작고한 김수영 시인의 무덤이 있는 소나무 숲이었고 부근에 그의 누이인 현대문학 편집장 김수명이 살았다. 갖가지 성향과 그룹의 삼사십대 문인들이 모였는데 거의 절반 이상이 다시는 그런 모임에 나타나지 않았다. 얼마 안 가서 장준하를 비롯한 재야세력이 박정희의 유신 선포에 반대하여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하자, 이 모임은 동참과 찬동을 표명하며 명동에서 성명서를 발표, 전원이 연행 당하게 된다. 이 일로 공안당국은 이호철 등의 문인 다섯 사람을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구속한다. 김지하의 필화 사건에서 이호철의 간첩 누명에 이르기까지 표현의 자유와 민주화를 위한 문인 조직의 필요성은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나는 1971년 가을에 홍희담과 결혼했다. 언제까지 글을 쓴답시고 어머니의 집에 함께 살며 아내까지 얹혀서 살 수는 없었다. 직장에 다닌다고 출판사에도 나가 보았지만 하루 종일 남의 글을 뒤적이며 앉아 있는 시간이 얼마나 허망한지 숨이 막히고 초조해졌다. 나는 자신의 글을 쓰기 위해서 점심 시간에 사무실을 나와 전화를 걸었다.

-저어 죄송하지만 내일부터 그만 두겠습니다.

-황형 왜 그래, 무슨 기분 나쁜 일이라두 있는 거야?

-그건 아니구요. 그저 내 글을 쓰고 싶어서요.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