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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부른 개인정보 대책 … 금융사도 소비자도 어리둥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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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회사원 조수현(28·가명)씨는 금융사 콜센터를 이용할 때마다 불편함을 느낀다. 콜센터마다 본인 확인을 위해 물어보는 정보가 달라서다. 조씨는 “회사별로 결제계좌나 등록한 이메일 주소, 집 주소, 전화번호 등을 무작위로 물으니 예전보다 번거롭다”고 말했다. 서비스를 이용하거나 정보를 변경할 때 받는 문자도 공해다. 회사원 추석민(29)씨는 “개인정보가 털린 이후로 뭔가를 할 때마다 문자 승인을 받는 게 짜증난다”고 했다. “금융사 자체 보안을 강화하는 건 좋은데, 유출 실수를 고객 불편으로 고스란히 떠넘기는 것 같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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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12월 한국스탠다드차타드·씨티은행의 고객 정보 유출을 시작으로 1억건이 넘는 카드사 정보 유출사건이 적발된지 일년이 다 돼 간다. 대형 금융사고가 벌어진 다른 때처럼 금융당국은 올 3월 대대적인 개인정보 유출 재발방지 대책을 내놨다. 고객 입장에선 금융거래가 더 번거롭고 불편해졌다.

 지난 8월 주민등록번호 13자리의 수집·이용·제공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내용으로 개정된 개인정보보호법이 시행됐다. 시행 100일이 지난 현재 금융사별 운영방식은 제각각이다. 일부 카드사들은 전화(ARS) 상담 때 주민등록번호 대신 생년월일 6자리·카드번호·휴대폰번호로 본인 확인을 한다. 반면 하나SK카드 등은 아직도 주민등록번호를 받는다. 우리·현대카드 고객들도 최근까지 주민번호를 알려줘야 했다. 카드사 관계자는 “시스템 변경에 시간이 걸리는 데다 당국이 내년 2월까지 처벌을 유예해 아직 시간이 있다”고 설명했다. 개정 법에는 ‘금융거래’에 한해 불가피한 경우 주민번호를 수집할 수 있게끔 예외를 두고 있다. 카드 결제 외에도 캐시백이 되는 포인트나 혜택 등을 금융거래로 봐야 하는지 해석상 논란의 여지도 있다. 하나SK카드 관계자는 “다음달 당국이 내놓기로 한 ‘금융거래 가이드라인’을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라고 전했다.

 유출된 정보를 활용한 전자 금융사기를 예방하기 위해 추가 전화 인증, 복잡한 비밀번호 설정 의무화 등을 내걸어 소비자들이 불편을 호소하기도 한다. 회사원 박모(32)씨는 “외국에 머물 일이 있어 한국 전화를 중지하고 외국 전화를 썼는데 추가 전화인증 때문에 인터넷 뱅킹을 이용할 수 없었다”며 “공인인증서와 같은 기존 방식을 쓰더라도 금융사가 자체 보안을 강화하고 이를 정부가 잘 관리·감독하면 안전한거 아니냐”고 반문했다.

 금융사들의 보안 시스템 강화도 순탄치만은 않다. 최근 A금융사는 ‘소프트웨어적으로 망분리를 한 PC로도 사이트를 검색할 수 있게 해달라’는 민원을 대법원에 넣었다. 사정은 이렇다. 금융위는 정보유출을 막기 위해 업무용 컴퓨터를 내부망과 외부망으로 분리하도록 했다. 금융사 입장에선 한 업무에 컴퓨터를 두 대 쓰기 힘들어 한 대로 번갈아 내부망과 외부망 작업을 한다. 하지만 대법원을 비롯해 적지 않은 정부기관 사이트가 이런 컴퓨터의 접속을 차단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 인터넷등기소, 홈택스, 한국토지정보시스템, 기상청 등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고객에게 돈을 빌려주려면 자산, 신용, 소송상황 등을 매번 확인해야 하는데, 접속이 안되는 사이트가 나올 때마다 프로그램을 보완하다 보니 시간이 지연되고 비용도 늘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내부망과 외부망 분리도 진척이 느리다. 새정치민주연합 김영주 의원실이 금융감독원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은행과 보험 전산센터는 각 10곳, 증권사는 24곳만 망분리를 끝냈다. 카드사는 9개사 중 7곳이 완료했다. 본점·영업점에서 사용하는 직원 PC 망분리 작업은 훨씬 더디다. 카드사(50%)와 은행(33.3%)을 제외하고는 완료율이 한 자리수에 그친다. 김영주 의원은 “금융당국이 정보기술(IT)·보안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 없이 성급하게 대책을 내놓아 금융사들은 혼란스럽고 소비자들은 불편함을 떠안게 됐다”며 “정책을 내놓을 때 소비자를 최우선에 두고 현실성이 있는지부터 생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유미·심새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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